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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Jan 01. 2023

한 번쯤은 행복하게 살다 가고 싶어 Ⅰ

이상하고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존재여도 괜찮은 자유를 위해





   


stage 1. 생존전략 내 상처는 특별하다



나는 스스로를 잔인한 운명의 억울한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이 집에서 태어난 나의 과거를 돌이킬 수도 없고 수치스러운 엄마를 바꿀 수도 없다. 나는 이 늪에서 헤어날 수 없고 이렇게 살다 죽을 것이다.

아무도 나 같은 엄마를 가지지 않았고 누구도 나처럼 살지 않는다. 내 상처는 이상하고 수치스럽고 일반적이지 않다.  내 고통은 하늘 아래 오직 나만 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을 수 없고 결코 환대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나의 엄마는 내가 두 돌이 되기 전에 안녕 인사도 없이 나를 버리고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정신분열을 앓다가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스물여섯에 정신병원에 격리되어 십삼 년을 살았고 주검이 되어서야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엄마를 지우고 싶어 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엄마를 잊은 척하며 살았다. 누구도 엄마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나는 엄마의 이름조차 묻지 못했다. 늘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내 몸속에는 수치심이 뜨거운 피처럼 흘렀고 불안과 두려움이 맥박처럼 멈추는 법이 없었다. 마치 내 몸이 죽어야 끝날 것처럼.

미친 여자의 딸이라는 수치심과 모두가 버린 그녀의 몸에서 나왔다는 절망감, 그녀처럼 살다 갈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만 했다. 누구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자, 태어날 때도 환영받지 못했고 살면서도 환대받지 못했던 그녀와 다르다는 것을 세상사람들에게 증명해야만 했다.

나를 버리지 마세요. 나를 미워하지 마세요.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에요. 나를 낳은 그 여자와는 다르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엄마와는 다르고  쓸모 있는 존재임을 숨 쉬듯 증명해야 했다. 한 순간도 쉴 수 없었다.  


이것은 나와 내 엄마의 이야기이다.

당신은 어떤 엄마를 가졌는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가? 당신도 나처럼 억울한 피해자인가? 당신도 나처럼 이상하고 낯설고 도망치고 싶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도 나처럼 세상은 결코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너무 크고 무거웠다. 엄마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죽음도 몸이 사라지는 것일 뿐 엄마와의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부인할 수 없는 그녀의 딸이다. 세상이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여자를 엄마로 둔 수치심과 그 엄마를 부인하고 증오하는 죄책감, 동시에 나를 버린 괴물 같은 엄마를 향한 그리움은 나의 내면에서 뒤섞여 나 자신을 이상하고 기괴한 존재처럼 느끼게 했다. 수치심은 수치심을 낳고 괴물은 괴물을 낳는다.






엄마를 죽이고 도망가던 자식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피 묻은 엄마의 심장이 데굴데굴 굴러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괜찮니?”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어디에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짧고 강렬한 우화를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엄마라는 존재는 이렇게 위대하고 엄마의 사랑은 이렇게 대단한 것이었다. 굳이 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모성애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이야기들은 세상에 넘쳐난다.


엄마는 절대 아이를 버리지 않는다. 엄마는 끝까지 아이를 지켜낸다. 엄마의 품은 한없이 넓고 따뜻하다. 엄마는 아이를 위해 헌신한다. 엄마의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는다.

엄마는 그런 존재라고 세상은 말한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그런 엄마를 가졌구나. 그렇게 언제나 자식의 편이 되어주고, 한 순간도 자식을 잊는 법이 없고, 자식을 한없이 따뜻하게 품어주고, 결코 자식을 버리지 않는 엄마가 모두에게 있구나.

그런 엄마에게서조차 버림받은 나는 얼마나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존재인가. 피 묻은 심장이 되어서도 자식을 걱정한다는데 내 엄마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단다. 나는 세상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로구나.






나는 특별히 불행한 사람이야

누구도 나처럼 살지 않아. 나 같은 사람은 없어.

왜 하필 이런 여자가 내 엄마야

다들 괜찮은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나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어.

이해받지 못하면 비난받고 버려지는 거야.

엄마를 바꿀 수 없으니 이 고통은 벗어날 길 없는 운명이야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사랑하겠어.

내 진짜 모습을 알고 나면 모두 나를 떠날 거야

내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불행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야

나는 이 고통에 평생 묶여 살 수밖에 없어  

나는 이 저주를 벗어날 길이 없어

나는 너무 억울해

왜 나만 이 고통을 받아야 해

누구도 날 환영하지 않아.

나는 환영받기 위해 노력해야만 해.

세상은 안전하지 않아. 나는 나를 지켜야만 해.     


내 머릿속의 생각들은 수없이 반복되면서 확고한 신념이 되었고, 그 신념들은 다시 더 큰 불안과 두려움, 수치심과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난 생각과 감정들은 나를 잠식했고, 내가 되었고,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끝도 없고 의미도 없는 고통을 기약 없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길고 깊은 고통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는 종착지나 의미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도 없는 나만 가진 이 고통은 특별하다. 특별한 고통을 겪는 나는 특별하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신은 나를 알고 나도 신의 뜻을 안다. 특별해서 고통스러운 것인지 고통스러워서 특별한 것이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마치 갑옷을 입은 듯 내 존재가 조금 더 선명해지고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스러운 특별함이었다. 나 자신이 귀하고 당당하게 느껴지는 특별함은 아니었지만 보잘것없고 초라한 존재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기분이 들었다.  고통스러울 때 내가 더 잘 느껴졌고, 고통을 느낄 때 내가 더 나인 것 같았다.






나의 몸과 무의식은 이미 고통에 찌들어있었고, 고통과 분리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는 패배감에 압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나의 패배를, 나의 비참함을, 나의 기괴함을, 나의 보잘것없음을 누구도 알아서는 안된다. 나는 당당한 척했고, 괜찮은 척했고, 아프지 않은 척했고, 슬프지 않은 척했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내면에서는 간절히 행복을 원하는 나와 행복해서는 안 되는 내가 충돌하고 뒤엉켰다.

행복을 원하지 마. 자유도 원하지 마. 원하는 만큼 더 비참해져. 엄마를 원할수록 더 초라해진 것처럼.

엄마가 내 운명이었던 것처럼 불행도 나의 운명이었다. 나는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다.

고통과 불행쯤은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다. 남들의 행복이 견딜 수 없이 부럽지만 행복은 비극의 주인공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행복이나 자유는 남들의 것일 뿐 내 것이 아니다. 남들에게 다 있는 좋은 엄마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사실 나는 나 자신이 비극적 운명의 희생자로 느껴질 만큼의 적당한 고통이 필요했을 뿐, 그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 고통의 실체를 마주하고 고통의 밑바닥까지 맛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 속으로 뛰어든다면 나는 녹아내리고 말 것이다. 진정한 나를 찾아 바깥으로 헤맬 뿐, 정작 바다로 뛰어들지 못하는 소금인형처럼.


특별한 운명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상처라는 생각을 붙잡고 있는 이상 나는 굳이 고통의 실체와 마주하지 않아도 되고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 고통이 사라지면 특별함도 사라질 것이다. 특별한 운명을 유지하기 위한 적당한 고통, 세상을 비난하며 피해자로 남을 수 있는 고통,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 벗어날 수 없고 나를 더 나답게 하는 고통을 나는 은밀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것은 행복이나 자유 따위는 감히 가질 수 없는 자의 생존 방법이었다. 미치거나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자기기만이었고 교묘한 속임수였으며 도피였고 타협이었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한 번쯤은 행복하게 살다 가려는 자는 먼저 살아남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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