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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Jan 04. 2023

한 번쯤은 행복하게 살다 가고 싶어Ⅱ

이상하고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존재여도 괜찮은 자유를 위해



stage 2. 뜻밖의 출발점 피할 곳 없는 고통과 옛것이 무너지는 혼란




닻을 내리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행복하고 싶어서 원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듯 결혼을 했지만 도망친 그곳에 파랑새는 없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벗어나 도망쳐도 어린 시절 몸에 새겨진 방법 말고는 사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진짜 욕구나 감정을 부정하고 회피했으며, 내 부모와의 관계에서 받은 고통을 시부모에게 투사하고, 남편에게 내 감정과 욕구 충족의 책임을 전가했고, 아이들이 내 결핍과 수치심을 위로하고 보상해주기를 교묘하게 요구했다.


어린 시절 원 가족 안에서 생존하기에는 효과적이었던 은폐, 외면, 회피, 통제, 완벽주의, 자기기만 같은 방어기제들은 어른으로서 친밀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병들어갔고, 남편과의 관계는 애쓰고 노력할수록 혼돈과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이들은 불행한 엄마의 감정을 받아내고 위로하는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떠맡았다. 나는 좋은 엄마, 착한 아내로 살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면서 겨우 생존하고 있었다. 몸에 밴 어린 시절을 반복하며 살아갈 뿐, 행복이나 자유와는 아득히 멀었다.


결혼을 하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부모와 분리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얽히고 경계 없이 녹아들어 있어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그를 가장 잘 이해하는 특별한 딸이고 싶었고, 엄마의 존재는 부정하고 증오했으며, 새엄마에게는 친 딸 같은 의붓딸이 되고 싶었다. 내 아이들은 그런 나의 충족되지 않은 유아기적 욕망에 동참해야만 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아버지와 새엄마의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며 대리 만족했다. 아이들은 나의 분신이었고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경계를 상습적으로 침범하는 무법자였다. 나는 과거의 결핍에 매달려 현재를 짓밟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나와의 관계에서 행복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았다. 나는 관계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고, 여태 살아왔던 것처럼 안팎으로 가짜와 거짓을 쌓으며 살고 있었다.  




내가 서른다섯 살이던 해 겨울에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암 진단을 받았다. 내가 아는 한 암전문의는 암을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아는 병”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 표현이 나의 내면의 병을 설명하는 것처럼 들렸었다. 내 것이 아닌, 나를 좀 먹는 것을 내 안에 품고 내 것처럼 키우는 병...     

아버지의 유년기도 나의 그것처럼 황폐하고 외롭고 목말랐었다. 그리고 평생 은폐와 회피와 통제와 완벽주의가 자신을 구원해줄 거라고 믿으며 살았다. 아버지의 내면도 그의 몸처럼 병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암 선고를 받은 지 반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감성적인 소년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던, 막내로 태어나 맏아들의 책임을 지고 살았던, 자신의 삶을 뜨겁게 사랑했던, 행복해지고 싶어 쉴 수도 없었던 내 아버지가 죽었다. 나는 엄마의 죽음을 회피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죽음도 외면했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는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아버지의 죽음을 직면하면 그 고통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역기능적 가정에서 부모의 불화 속에 생존해야 하는 아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한쪽 부모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 부모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돌봄 받지 못하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동일시한 부모의 감정을 헌신적으로 돌본다. 나는 엄마로부터 함께 버림받은 아버지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그와 나를 동일시했다. 나는 나 자신을 아버지의 고통과 마음을 이해하는 특별한 딸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행복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자신의 결핍을 밖에서 채우느라 늘 바쁜 사람이었다. 어린 내가 아버지를 필요로 할 때 그는 언제나 내 곁에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며 자랐지만 언젠가는 아버지가 나의 노력과 충성을 반드시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아버지의 가장 소중한 딸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의 규칙과 신념은 내 것이 되었고, 불행한 아버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나의 행복이라고 믿었다. 나는 아버지의 감정과 욕구를 내 것처럼 돌보며 살았다.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부모의 감정과 욕구를 돌보며 사는 어린 시절의 결핍은 어른이 되어서도 끝없이 반복되었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내가 죽은 것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떠밀려 나는 고통의 밑바닥에 던져졌다. 사방이 꽉 막힌 출구 없는 무덤 속에 갇힌 것처럼 숨이 막히는 고통이 찾아왔다. 모든 것이 뿌리 채 흔들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울과 무기력에 일상이 무너졌다.

아버지가 사라졌는데 나의 세상도 사라졌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도 내가 가고 있던 길도 진짜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한 발자국 옆으로 내디뎌 광기 속으로 숨거나 죽음 속으로 도망치고 싶은 강렬하고 구체적인 충동을 느꼈다. 내 안에 아무것도 없는 공허는 죽음과도 같았다.


살아야 했다. 내 엄마처럼 아이들을 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었다. 나는 살아야만 했다. 숨구멍조차 없는 고통 속에서 벗어나야 했다. 구원이 간절해지자 밖으로만 향해 있던 나의 관심과 주의가 나의 내면으로 빨려 들어왔다.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아야만 했다. 넘어진 자리에서만 일어설 수 있으니 내가 넘어진 자리를 찾아서 넘어진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나는 나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나는 왜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 나는 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가? 나는 이미 삼십 대 중반이고 세 아이의 엄마인데 왜 아버지의 죽음에 어린아이처럼 무너지는가?


고통의 밑바닥에 가라앉아서 초미의 집중으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흘러갔다. 마침내 어둠 속 어딘가에서 한줄기 빛처럼 작고 간절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버리고 온 과거의 그 아이가 내 안에서 울고 있었다. 살려 줘. 나를 구해줘. 이렇게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아. 한 번쯤은 자유롭게, 한 번쯤은 행복하게 살다 가고 싶어.

버려진 줄 알았던 그 아이가 거기에 있었다.

생생한 생명력으로 빛나던 그 아이가 여전히 내안에 살고 있었다.




인생 초기에 반복적으로 욕구나 감정이 좌절되고 거부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거짓 자아를 만들고 부모의 욕구나 감정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가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리고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기존의 신념 체계가 흔들리는 ‘각성’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은 나를 뿌리까지 흔들어 깨어나게 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나쁜 일이 아니었다. 나의 죽음도 내 아이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죽음은  당연하고 익숙한 것들을 뒤흔들어 남은 자들이 자기 자신과 현실과 삶을 다시 보게 한다.


 익숙한 것이 흔들리거나 사라지는 혼란을 우리는 고통으로 경험한다.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 판단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혼란이 불안과 두려움을 심화시키고 일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은 나쁜 일이 아니다.  


혼란은 평온을 깨는 것이 아니라 익숙함을 깨는 것이다. 익숙했던 나의 신념이 뿌리째 흔들리고 뽑혀나갈 때 자유가 시작된다. 혼돈과 혼란 없이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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