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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Jan 31. 2023

내가 경험한 ‘치유와 회복’을 말한다

나의 무엇이 달라져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내면 치유, 심리 치료, 상처 치유, 참 자아 찾기, 잃어버린 나를 찾는 여정... 이 길을 칭하는 이런저런 이름들이 있다. 지난 20년간 내가 걸어왔고, 지금도 걷고 있는 이 여정을 나는 ‘치유와 회복의 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 위에서 나는 자살하거나 미쳐버릴 것 같았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나로 살아가는 고통 대신 나로 살아가는 기쁨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서른여섯에 시작된 나의 치유와 회복의 여정은 올해로 꽉 찬 20년이 된다.  

    

나의 여정은 엄마에서 시작되었다. 얼굴도 모르고 수 십 년  전에 사망한 엄마가 내 고통의 뿌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엄마가 다다르지 못했던 자리에 나도 결코 가닿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고 나를 넘어서기 위해 엄마를 넘어서야만 했다.    

  

지우고 싶었던 엄마를 소환하고, 엄마를 찾아 세상 끝까지 걸어가고, 내가 찾은 엄마를 온몸으로 만나고, 마침내 엄마를 온전히 떠나보내는 여정은 15년에 걸쳐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 길 끝에서 걸어온 길 전체를 돌아보며 그 여정을 글로 써서 책으로 만들었다. 3년 전의 일이다.    

 

내 고통의 뿌리를 탐색하고 탐구하면서 상처의 대물림을 처절하게 확인했고 내 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물려주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그래서 어미의 지난했던 자아회복의 여정을 그들에게 남기고 싶었다. 이제 아이들은 온몸으로 걸어간 발자국과 글로 남겨진 나의 용기를 물려받을 것이다. 훗날 내가 떠난 뒤 그들이 스스로를 넘어서기 위해 어미를 넘어야 할 때가 오면 나의 자아회복투쟁기는 그들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촛불이 되어줄 것이다.  

   

이즈음 나는 지난 20년 동안의 치유 여정 전체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와 그 전체를 말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생겼음을 알았다. 이제 내가 경험한 치유의 전반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나의 언어로 정리해보려 한다.    



 





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치유되었고 회복되었다. 지금의 나는 20년 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느낄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지각과 신념을 지닌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나는 해방되었고, 나는 자유다.

    

나는 심각한 병자였다. 마음의 병이 깊어서 몸까지 갉아 먹힌 상태였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우연히 상담실을 찾아들었고, 그곳에서 나보다 치유의 길을 앞서 걸어가던 상담자를 운 좋게 만나 3년의 시간을 함께 했다.


인긴은  이야기로 자신을 이해한다. 상담실에서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나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 고통의 뿌리를 이해하게 되었고, 표현하지 못해 응어리졌던 가슴이 많이 가벼워져졌지만 일상은 내 바람만큼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일상을 살아가는 내 몸이 과거로부터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몸은 무의식의 저장소이다. 나는 언어로는 가 닿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몸에서 찾아내고 이미 내 몸이 되어버린 상처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수년간 몸을 만나고 몸을 공부하고 몸의 이야기를 듣고 온몸으로 상처를 쏟아내었다.  

   

내 안에서 웅크려 울고 있는 내 과거 속의 아이들을 해방시켰고 나의 고통스럽던 부부관계를 서로의 상처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보듬는 안전기지로 만들기 위해 부부치료를 공부하고 삶에서 실행했다.


나를 치유하는 길 위에서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만났던 치유와 회복과 성장의 기회를 붙잡고 매달려서 배우고 익혔다. 많은 이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많은 책을 읽었다. 나는 끊임없이 그 언어들의 의미에 질문을 던지면서 그것들을 내 살과 피가 될 때까지 꼭꼭 씹어 삼켰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더 익숙한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어갔다.

     



치유와 회복의 길 위에서의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때로는 아프게 끝난 인연도 있지만 그 인연들이 있어 나는 새로운 것들을 배웠다. 모두 좋은 인연이었다. 엄마와의 인연조차도.   


나에게 찾아왔던 모든 인연들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 인연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는 20년 전의 나와 무엇이 달라졌을까?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말할 수 있다면, 무엇을 변화시켜야 삶이 달라질 수 있는지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로워진 나는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무엇이 변화해서 삶이 변화한 것일까?



 첫 번째, 자아 정체성의 변화이다.

  

나는 무엇을 나라고 느끼고 규정하는가? 즉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한 나의 신념이 완전히 달라졌다.



-가짜 나 VS 진짜 나


20년 전 내가 ‘나라고 느끼고 규정했던 나’는 진짜가 아니었고 진실도 아니었다.


나는 버려졌다. 나는 상처받았다. 나는 훼손되었다. 나는 수치스럽다. 나는 혼자이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행복해질 수 없다. 나는 이상하다. 나는 기괴하다. 나는 일반적이지 않다. 나는 엄마처럼 살다 갈 운명이다. 나는 언젠가 미칠지도 모른다.


나에게 치유의 과정은 ‘나’라고 믿었던 가짜와 거짓의 껍질을 벗는 과정이었다. 가짜와 거짓을 벗겨낼수록 진짜와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러고 보면 치유의 원리는 단순하다. 거짓이 모두 벗겨지면 참만 남는다.


나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저 과거의 축적이었고 상처의 총합이었다. 과거의 껍질들을 한 겹 한 겹 벗겨내자 그 상처들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었던 진짜 내가 거기에 있었다. 버려질 수도 없고 훼손될 수도 없고 수치스러울 수도 없는 온전하고 빛나는 내가 내 안에 있었다.



-부분인 나 VS 전체인 나



나는 착하고 책임감 강한 해결사 맏딸이었다. 나는 꺾이지 않는 강한 사람이었다. 나는 불의에 눈감지 않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으며 어려운 사람을 나서서 돕는 정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가족에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로 사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없는 나의 모습이 느껴지고 발견될 때마다 나의 부족함이 수치스러웠고 죄책감이 들었다.


우리는 사회와 부모가 인정하는 나의 일부만을 나라고 수용하거나,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나의 한 부분을 외면하고 억압할 때 나 자신과 갈등을 일으키고 단절된다.  


분석 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프 융은 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억압되고 버려진 나의 일부분을 그림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온몸으로 그림자를 살아야만 그림자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제 나는 세상과 아버지의 잣대에 맞춰 버리고 억압했던 나의 그림자를 나로 인정하고 수용하며 살아간다.

나는 악하다. 나는 비겁하다. 나는 무능하다. 나는 이기적이다. 나는 약하다. 나는 게으르다. 나는 까칠하고 모질다. 나는 미성숙하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보잘것없다.

나는 초라하다.  


우리는 누구도 작지 않고 누구도 크지 않다. 더 위대한 사람도 없고 더 초라한 사람도 없다. 우리 모두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 때 세상에 온 목적을 다하는 것이다.

내 안에서 창조되는 모든 것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나일뿐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언제나 천사와 악마가 공존한다. 그래서 무엇이든 괜찮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바라보고 인정하고 수용하고 이해하면 된다. 세상의 잣대로 자신을 억압하고 잘라내고 비난한다면 나로 살아가는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생각과 감정과 존재에 시비를 걸지 않는다. 나는 내가 선한지 악한지를 묻지 않는다. 내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는다. 내가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판단하지 않는다.

오직 나는 지금 나 자신에게 진실한지만을 묻는다. 그래서 나는 자유다.


<질문>

그렇다면 20년 전 나는 무엇을 나라고 느끼고 규정하며 살았던 것일까?

왜 나는 그것들을 ‘나’라고 믿으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두 번째, 지각의 변화이다.


지각의 변화는 몸과 무의식의 변화이다. 상시적이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 공허감, 외로움, 무기력, 우울로부터 내 몸은 해방되었다.

20년 전의 내 몸은 그런 느낌과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것들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무채색이었고 내 몸은 지금 여기의 세상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나의 신념뿐 아니라 내 몸의 느낌과 감정도 내가 경험한 과거의 축적이고 총합이다. 과거의 찌꺼기로 가득 찬 몸은 지금 여기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는 힘도 여유도 없다. 나는 과거의 찌꺼기로 만든 필터로 세상을 보고 느꼈고, 무의식에 저장된 과거의 기억대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안전하지 않았고 수시로 나를 버리고 아프게 했으며 나를 불안하게 했다. 적의 공격을 염려하여 잠들지 못하는 병사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 몸은 한순간도 쉬지 못했고 나의 감각은 오직 생존을 위해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과거의 껍질들을 수 없이 깨고 벗는 동안 내 몸은 마침내 쉴 수 있게 되었다.

‘천 년 동안 일하던 대지가 마침내 하늘을 보며 쉬고 있다.’

내 몸이 처음 온전히 쉴 수 있게 되었을 즈음에 오체투지 하며 티베트를 횡단하는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TV 다큐멘터리에서 들었던 문장이다. 내레이션이 당시의 나의 심정을 말하는 것 같아서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내 몸은 더 이상 적의 공격을 염려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보고 느끼고 누리며 나만의 리듬으로 춤추며 살아간다.  



인연이 오면 여한 없이 사랑할 수 있기에 인연이 다하면 여한 없이 이별할 수도 있다. 기쁨과 즐거움이 오면 맘껏 누릴 뿐 붙잡으려고 애쓰지 않고, 슬픔과 분노가 오면 그 또한 온몸으로 느끼고 누릴 뿐 예전처럼 저항하고 도망가지 않는다.  

    

때로는 낯선 상황을 만나서 과거의 감각과 감정의 패턴이 돌아올 때도 있지만, 이제는 얼어붙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으며 그것들을 바라보고 인정하고 항복하고 밖으로 풀어낸다. 찌꺼기가 남지 않을 때까지. 그리고 지금 여기의 나의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   

  

새로운 나의 몸은 삶의 인연과 고통을 이전과는 다르게 보고 느끼고 행동한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나다. 이제 나는 새로워진 몸으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다. 내 몸이 달라지면 삶의 내용과 질이 달라지고 세상도 달라진다. 내 몸은 세상과 내가 만나는 첫 번째 경계이고 내 삶을 경험하는 나의 집이기 때문이다.   

       

<질문>      

왜 나의 몸은 긴장이 떠나지 않는 무감각한 몸이 되었을까?

늘 긴장되어 쉴 수 없었던 내 몸은 어떻게 쉴 수 있게 되었을까?

어떻게 새로운 감각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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