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을 말씀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들려진 이 말씀은 현대인 입장에서 봤을 때 심히 구시대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억압적으로 보인다. 그 당시 기준으로도 꽤나 파격적이었고 이후에도 많은 신학자들을 괴롭혔을 정도로 난해한 구절이었다. 그러나 저 말씀이 시대 맥락 안에서 갖는 무게가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은 인식해야 한다. 2000년 전 유대에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미디어가 없었다. 종이와 인쇄술은커녕 문자의 보급조차 원활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지도자급 인사라고 하더라도, 접할 수 있는 글과 이미지는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시점에서 마주치는 제대로 된 몸선은 거의 현실의 육체 밖에 없었으리라. 그마저도 종교 규율에 따라 가리어진 몸선들이다. 따라서 음란한 욕망을 가지고 여성을 관음하는 건 그 상황에서 꽤나 적극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가르침 받은 율법에 따라 아녀자를 사랑과 혼인의 대상으로 대우할 의무를 저버려야 했다. 전인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투영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려는 의지가 수반된다. 루터의 해석을 따라 "음욕을 품고"의 의미를 일회의 생각 단위로 해석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마음의 상태로 본다면, 더욱더 대범한 결심(?)이 있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반면에 현대인은 이미 몸선으로 포화된 미디어에 노출되었다.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몸들은 너무나 많다. 특히 스마트폰의 보급 이후 그 추세는 훨씬 강력해졌다. 힘들게 비디오를 뒤지고 잡지를 오려가며 몸에 대한 시각적 쾌감을 탐하는 세대가 아니다. 나의 손가락 클릭 몇 번만으로 원하는 몸선을 얼마든지 탐할 수 있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노골적인 섹슈얼리티들을 실시간으로 떠먹여 준다. 콘텐츠가 넘쳐나는 플랫폼과 최적화된 스크린이 늘 함께 한다. 몸선은 도처에 있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현실의 아날로그 기반이 아니다. 가상의 이미지나 영상으로 다가오기에 더욱 거리낌 없이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는 예수님의 저 말씀이 유독 어렵게 느껴진다. 너무 쉽게 어기게 되기 때문이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맘 편히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대상화하는 지금 누가 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개인 의지의 문제에서 사회 구조의 문제로 전환된 현대에도 '음욕을 품은 시선'을 죄라고 볼 수 있을까? 법정용어가 아니라 신학의 언어로서 판단한다면, 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죄의 층위 또한 개인의 도덕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진화했다고 전제한다. 즉, 사회 구조적 악으로서 '음욕'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미디어를 통해 몸선을 탐닉하는 게 잘못됐으면 얼마나 잘못 됐다고 죄와 악이라는 거창한 표지를 붙이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욕망을 영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이는 이 책의 일관된 기조이다.
몸은 거기서 거기이다. 가슴이 무릎에 달렸다든지, 어깨가 세로로 뻗어있다든지 하지 않는다. 잘생기고 못나고의 차이는 있지만 다 비슷하게 생겼다. 차은우도 나도 서로 닮은 팔과 다리를 가졌다. 상(이미지)의 관점에서는 일종의 재현(representation)인 것이다. 차은우와의 비교는 도저히 수긍하지 못할 수도 있기에 약간의 수정을 더한다. 엄청난 존잘 그룹이 있다고 상상해 보면 그들이 서로 많은 유사성을 공유함을 알 수 있다. 오똑한 코, 날렵한 턱선, 훤칠한 키, 넓은 어깨, 탄탄한 가슴, 쭉쭉 뻗은 팔과 다리 등등. 꼭 저 목록에 해당하는 유사성일 필요는 없지만, 분명히 어떤 면에서는 서로에 대한 재현이 될 수 있다. 특히, 식별의 주 역할을 감당하는 얼굴을 제외하고 몸만 본다면 더욱 동질성이 크다. 안면인식장애를 가지지 않았다면 얼굴을 보고서는 금방 사람을 구별할 수 있지만, 팔다리만 떼어놓고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구분하기가 어려운 데서 알 수 있다.
몸과 몸이 서로의 재현이기에 누군가의 몸을 볼 때 나타나는 반응 또한 그와 비슷하게 생긴 다른 몸들을 향해 가져왔던 태도의 재현으로 나타난다. 섹스도 마찬가지이다. 포유류의 유성생식이 진행된 이후로 상대 성의 몸을 성적 개체로 대상화한 인식이 수 조 번 이상 반복돼왔기 때문에, 사람 또한 상대 성의 몸을 섹스 행위의 가능체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누적된 반복 수가 어마어마해서 본능의 영역으로 각인되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재현과 반복은 뇌의 가소성을 타고 우리의 몸의 작용을 형성한다. 운동선수들이 같은 동작을 죽어라 반복하는 이유도, 군인들이 전쟁 상황을 대비해서 예상 시나리오를 짜 보는 것도 모두 이 재현의 반복을 통한 '훈련(discipline)'에 있다.
결과적으로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도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흔히들 "페티시"라고 부르는 단어는 본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우상)'을 숭배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본격적으로 섹슈얼리티와 결합해 "성적 페티시"라는 이름을 얻게 되자 신체 부위에 대한 이상 성욕을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겨드랑이 페티시, 손 페티시 등의 명칭이 등장했음은 그 부위가 성적인 대상으로 재현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몸에 대한 성적 태도가 사회에서 구성된 행위들을 통해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현대 미디어에서 몸선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발 빠른 접근성이 확보됐다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예상 가능하다. 미디어에서 노골적으로 섹슈얼리티를 추구하며 몸들을 소비해 왔던 사람이 어느 날 다른 몸을 보고 같은 방식의 재현을 갑자기 멈추는 변화는 개연성이 낮다. 성인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의 탄탄한 가슴을 보며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를 하염없이 느꼈던 사람이, 잘생긴 씨름 선수의 상체를 보며 갑자기 씨름 운동의 기술성이라든가 근육 훈련법에 대해 생각하긴 어렵지 않겠는가. 본래 가지고 있던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메커니즘과 더불어, 섹슈얼리티로 '훈련된' 육체는 몸선을 대상화하는 데에 익숙해진다. 소셜 미디어 속에 쇄도하는 '불특정 다수'의 몸선들이 난관을 초래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시청자와 공급자가 몸을 인격체의 일부로 이해하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 보도록 '규율(disciplined)'되기 때문이다.
성적 대상화보다 그것이 '내면화'되는 메커니즘에 방점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푸코의 언어를 끌어 쓴다. 성적 대상화를 도덕이나 법적인 관점에서 일회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건 소셜 미디어가 유발하는 위험성에 대한 반쪽자리 이해에 불과하다. 성적 대상화 담론은 이 '내면화'의 체계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 성적 끌림이라는 자연스러운 욕망을 단죄하지 않고, 대신 그 대상을 무분별하게 확장시키는 미디어의 구조를 중심으로 논의해야 문제의 원천을 포착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음욕에 대해서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사람은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망은 바로 자기 육체 안에 심기기에 다른 욕망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 육체성에 대한 경고는 내면화의 위험성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인격적 관계로서 성적 결합을 에로스적 사랑이라고 한다면, 도구적이고 파편적인 관계로서 성적 결합이 내면화되는 것을 음행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상호 독점적 관계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다른 대상에게 재현되지 않는 반면, 후자는 오로지 육체를 '매체'로 하기 때문에 비슷한 형태를 가진 다른 신체에 무한히 재현된다. 갈망이 적절한 대상을 조준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확장되는 순간 음욕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인격이라는 관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구속되는 반면, 음욕은 태생적으로 무한한 확장을 모색한다.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주인공 "네오"와 "트리니티"는 각각 한 명이고 둘 만의 관계성을 갖지만, "스미스 요원"은 시스템 내 사람들에게 무한히 빙의하는 것처럼 말이다. 섹슈얼리티의 만족만이 목표인 체계 하에서는 다른 신체들이 모두 하나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래서 욕망은 시시각각 투영되지만, 또 언제고 떠나갈 수 있다. 한국 식문화에서 언급한 '풍성한 배고픔'의 유비가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망은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는 동시에 소모적이다. 인간적 관계나 애정이 아니라, 재현된 신체만을 취하기 때문에 밀물처럼 쏟아졌다가 썰물처럼 휩쓸려나간다.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육체가 된다면,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빈칸으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셜 미디어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육체에 대한 욕망은 끊임없이 채워지려고 시도하는 화수분에 가깝다.
더 섹슈얼한 신체에 대한 욕구는 계속된다. 아무리 예쁜 몸매를 봐도 그 한 명의 육체로는 욕망을 다 채울 수 없다. 숏폼 스크롤을 끊임없이 내려가며 더 탐스럽고 매력적인 신체에 주목한다. 보고 또 봐야 한다. 불행히도 내가 즐겨 찾던 몸이 덜 섹시하게 변한 경우, 혹은 하도 봐서 질린 경우에는 마음대로 다른 몸을 찾으면 된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눈알을 살짝 굴리는 것만으로 가능하다. 그렇게 육체미에 대한 눈은 높아지기만 하고 낮아지지는 않는다. 욕망은 채우기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콘텐츠에 등장하는 몸들은 자연스레 그 욕망이 반영된 육체를 갖는다. 남성향의 콘텐츠에서는 큰 가슴과 넓은 골반, 맑은 피부의 여성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반대로 여성향의 콘텐츠에서는 엘프와 같이 훤칠한 팔다리, 날렵한 턱선과 잔근육을 가진 남성이 있다. 서사는 다양하지만, 이상적 신체는 계속해서 재현된다. 그래야만 선택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디어를 통해 재현되는 신체에 욕망을 투영하는 과정이 익숙해져 버리면, 현실의 육체들에 대한 감각마저 변질될 수 있다. 현실의 육체들이 '대체될 수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으로부터 얻는 만족도는 급속히 감소한다. 내 애인의 몸이 성적으로 익숙해질 때 다른 육체를 찾고 싶어 진다면 가상공간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훈련된 육체가 현실의 관계를 망칠 수 있는 위험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인터넷, 스마트폰의 발달로 가능해진 포르노의 광범위한 보급이 성생활에 끼치는 악영향 또한 보고되고 있다. 성관계에 대한 지식을 함양시키고 몸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 포르노에 등장하는 몸은 욕망의 화신이다. 오로지 대상화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몸이다. 스토리라인도 결국 성적 욕구의 고조를 거들기 위해서 덧붙여질 뿐이다. 그렇게 욕망의 대상으로서 몸을 바라보는 관점에 익숙해지면 아날로그의 육체들에도 그런 지향을 갖는 것이 더욱 쉬워진다. 일종의 '경로의존성'이 생기는 것이다.
미디어를 통해 욕망을 투영하는 게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게 조금은 과장스럽게 들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치 모방범죄를 우려해서 게임을 과도하게 규제하듯이 터무니없는 우려를 과장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의 육체와 미디어 일반에 드러나는 신체는 분명 차이가 있다. GTA 시리즈 같은 게임의 그래픽이 꽤나 발전했지만, 여전히 현실의 신체와 비교해서는 재현의 한계가 있음이 사실이다. 나 또한 지금은 과한 게임 규제를 반대하지만 머지않아 가상에서 현실을 재현하는 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정교한 수준으로 발달한다면 그때는 훨씬 더 보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사실 지금도 FPS를 더 현실감 있게 만들지 않는 데에는 이와 같은 맥락의 취지가 있다. 가상과 현실을 칼 같이 구분할 수 있는 합리성이 우리 안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욕망의 위력은 절대로 무시해선 안 된다. "절대반지"를 가졌지만 자아는 점점 잃어간 골룸이 되지 않으려면 욕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반복을 끊어내야 한다.
그러나 개인에게 나 스스로도 잘 지지 못하는 굴레를 씌울 순 없다. 신체에 대한 섹슈얼한 욕망이 일반화되는 현상은 표면적으로는 개인 내면에서 발생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미디어의 비틀린 축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다수가 직관적으로는 이를 이해하고 있으나 당장 뾰족한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다. 무작정 규제할 수도 개인에게 일임할 수도 없는 고착상태인 것이다. 청소년의 정서적 건강과 관련하여서는 비교적 관심이 생겼고 제도적 모색이 이루고 있지만 미디어 일반이 우리의 욕망을 형성하는 기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바가 적다. 명확한 문제의식이 결집된다면 단호하고 본원적인 해결책을 구상할 날도 올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