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자유가 없는 게 뭐 대수인가? 결국 내가 욕망할만한 콘텐츠를 알고리즘이 떠다 먹여 주는데! 그게 섹슈얼리티면 또 어때? 어차피 아무도 안 보는데 마음껏 대상화하고 소비하면 돼. 어차피 걔네도 그럴 위험 감수하고 그런 영상 만든 거니깐"
글을 쓰다 보면 작은 속삭임이 심연으로 부를 때가 있다. 반드시 반박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라 머리로 여러 논리를 질서 정연하게 줄 세우곤 한다. 하지만 때로는 논리보다 강한 감정들, 그리고 동물에 가까운 욕망들이 날을 세우고 맞서기에 버겁다. 구구절절한 논리도 사람들의 추악한 욕망 앞에서는 사실 무력하다. 욕망이 먼저 있고, 그 뒤에 그 욕망을 정당화하는 생각들을 만들어낸다. 항상 그렇다. 상대의 몸선으로 자신의 눈을 만족시키고 싶은 욕망은 거의 모든 합리성을 압도한다. 그 압도적 무력감을 알기에 애초에 욕망과 이성의 대결구도를 만들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의 필요성에 대한 앎이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이성의 선물일 것이다.
유독 어렵게 쓰인 이 챕터는 내가 받은 몇 가지 충격에서 시작됐다.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알게 된 계기가 있다. N번방 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을 때 사건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자 검색을 했었다. 기사 내용에 묘사된 범죄 내용은 차마 끝까지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 그런 흉악범죄가 많은 사람들의 조직적인 공조와 방관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데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일차로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 남은 인류애마저 굴복시키는 허무맹랑한 연관검색어를 발견했다. 바로 유출된 성착취 영상을 구하는 키워드였다. 극악무도한 범죄로 지탄받아 주모자들이 잡혀 들어가는 와중에도 어떤 사람은 바로 그 영상의 몸선을 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그 이후에도 유사한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한 것을 보면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사실이었다. 성폭행을 당하든, 착취를 당하든, 자살을 하든,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영상이 유출당하든 그저 남의 몸을 성적으로 소비하려는 사람들. 무엇이 사람을 그토록 괴물로 만들었을까 설명이 필요했다. 설명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인간의 악한 본성으로 치부하기엔 정말 그들이 같은 인간인지가 믿기지 않아서, 같은 인간이라면 그들에게 있는 추악한 욕망이 나에게도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한동안 심란함을 떨칠 수 없었다.
심연의 우물에서 줄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오다 보니, 아직 심연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곳으로 이어지는 미끄럼틀을 발견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내게 들려진 위의 속삭임이다. 이 속삭임에 따라 곧바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견고한 저지선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건 앞서 쓴 식욕에 대한 재해석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 나의 욕망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로 채워지려는 미디어의 빈 공간을 인격에 대한 상상력으로 채워야 한다. 다수 대 대상이라는 짜임새로 직조된 매트릭스를 인간 대 인간의 아날로그로 치환하는 빨간약이 필요하다. 욕망의 파도를 휘몰아치는 구조는 피할 수 없지만, 때때로 가라앉을지언정 공감의 서핑보드를 타고 수면 위를 달리는 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타인의 고통⟫을 디지털화된 사진과 영상으로 소비하지 않고 현실의 살과 피로 감각할 수 있을까?
분명 상대방의 의도를 독심술사처럼 단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 욕망으로 상대방을 규정하지 않고 상대방의 인격을 내게 투사하면 된다. 내가 생각하는 틀에 맞춰 "상대방은 이런 의도일 거야"라고 확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된 나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한테는 마음껏 돌을 던지는 악인일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놀랄 만큼 관대하기 마련이다. 부모처럼 기다리고, 인내하고,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있다.
어느 정도 노출 수위가 있는 영상을 보았다면, 그 안에 상대방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을지 생각해 보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작은 행동들부터 시작하면 된다. 예를 들면, 아이돌 무대를 편집한 영상을 볼 때 대상 아이돌이 어떻게 보이기를 원하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특정 부위만 강조하는 움짤에 등장하거나 무대 중 불가피하게 비친 속옷사진이 돌아다니길 원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이돌들은 그런 치욕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생각이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됐는지 아니면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이해에서 왔는지 돌아보기 원한다. 또 사람은 자기 욕망과 현실을 착각하는 존재라는 점도 되새기면 좋겠다. 처지를 바꾸어보았을 때 부당하다면 그 콘텐츠는 보지 않으면 된다. 더 좋게는 그런 콘텐츠에 노출되지 않도록 다양한 넛지를 주면 된다. 그런 존중의 태도가 항상 섹슈얼리티에 대한 억압을 요청하는 것은 아니다. 불필요한 구속을 막고 나름의 방식으로 성적 욕망을 발산하게 허용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유명 AV 배우가 작품 홍보를 위해 찍은 스틸컷이라면 넉넉한 마음으로 몸선의 응시를 인정하리라. 여기서는 AV 산업 구조에 대해서는 잠시 의견을 유보하도록 한다. 작은 실천이라도 우선 시작하는 게 더 중요하니깐.
욕망보다는 공감과 연민을 선택하기. 사실 그 황금률만 지켜도 심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의 구조가 그 공감의 체득을 저해한다는 게 난관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불필요하게 억누르는 자의적 잣대가 사라져 가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담론의 빈자리에 미디어의 파편화된 욕망이 날 뛰게 되는 현상은 우려스럽다. 특히 우리가 사람과 사람이 맞대는 아날로그의 감각이 잊혀 가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MZ세대론은 MBTI 검사처럼 뭉툭한 유희거리에 불과하지만, Z세대와 그 이전을 나누는 특이점만은 실재할 수 있다. 이제 아이들은 오프라인에서 사회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먼저 디지털 미디어를 접한다. 스마트폰이 육아의 훌륭한 동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맞벌이로 가뜩이나 힘든 육아, 한숨 돌리고 한 수저라도 뜨기 위해서는 아이 손에 키즈용 애니메이션을 들려주어야 한다. 최대한 늦추더라도 결국에는 스마트폰이 필요하다. 활자보다 영상이, 면대면의 공동체보다는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느슨한 관계성에 더 익숙한 친구들과 함께 하게 된다. 오죽하면 게임 문화마저 이전과 다르다. 모바일게임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 PC방도 덜 가는 추세를 보인다. 삼삼오오 모여서 같이 놀러 간다는 개념보다, 각자 온라인 세상에서 접속하여 만난다는 개념이 친숙하다. 특히 몇 년 전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디지털화된 대상은 자신에게 투사하기 어렵다. 내 욕망을 반영해서 화면 안의 캐릭터를 움직이고 파밍을 하며 상대방을 공격할 수는 있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게임 캐릭터가 다치면 기분은 살짝 상하나 피가 철철 넘치고 쓰라린 그 감각은 내게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대상화된 객체는 감각과 욕망이 없고 조종될 뿐이다. 현실의 사람은 이와 분명히 다르다. 내가 욕망하고 감각하는 바가 있듯이 다른 사람도 나름의 감각과 욕망이 있다. 그리고 그 정도가 매우 상이하기 때문에, 충분히 헤아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인간관계에 대한 깊이는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반면 온라인 게임에서 형성되는 관계는 자유도가 높다. 오프라인 관계를 수반하지 않는 경우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관계를 끊어내면 그만이다. 인격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퀘스트나 미션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관계이고, 커뮤니케이션의 매체가 현실의 몸이 아닌 가상의 캐릭터이다. 감정을 이입할 유인도, 이입 가능성도 적다. 승리를 저해하거나 목표 달성을 방해한다면 화가 나는 대상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과 심정까지 고려할 여유는 없다.
이보다 더욱 피상적인 불특정 다수 대 대상이라는 관계에서는 그런 상호작용마저 조각화되기 마련이다. 달리는 수많은 댓글들을 읽으면서 하나하나 인격적 이해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나의 덩어리, '전체'로서의 팬에게는 감사할 수 있지만, 한 명, 한 명과 각자 인간으로서의 이야기를 터놓고 교류하는 관계를 형성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사실 그런 관계를 지향하는 자체가 아티스트-팬으로서의 관계성을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다른 팬들의 시기가 문제가 아니라, 아티스트-대중의 관계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역으로는 좀 사정이 나을 수는 있다. 크리에이터나 연예인들에게 심도 있는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추구하려는 팬들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콘텐츠에서 드러나는 한정적 이미지를 통해 상대방을 인식한다. 콘텐츠 미디어의 구조상 그런 이미지들은 일종의 환상에 가깝다. 크리에이터나 인플루언서들은 다수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그런 신화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이성적 매력이든, 성공의 서사이든, 브랜딩이든 반드시 필요하다. 결국 팔로워는 진정한 인격적 이해가 아니라 욕망과 상상에 의해 고착되는 감정을 통해 생겨난다. 심하게 말하면 환상을 먹고사는 우상적 관계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미디어 안에서 조각되어 가는 인격적 관계로 인해 공감과 연민은 점차 어려워진다. 상대방의 입장을 배제하고 나의 욕망을 투영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구도가 확립될수록 욕망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으로 변한다. 섹슈얼리티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 장에서 다루었듯 불특정 다수 대 대상이라는 구조도 문제시될 수 있지만, 문제의 본연은 그 틀 안에서 몸이 대상화되는 재현에 있다. 몸선의 포화 속에서 우리는 연민의 감각을 잃어가고 파편화된 상으로서 몸을 대한다. 미디어 안에서 반복되는 이 훈련이 우리의 욕망을 타락시키며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심화한다. 곧바로 이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