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와 영어를 무분별하게 섞은 힙합 가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 글에서는 구태여 '섹슈얼리티'라는 어휘로 이론화하는 이유가 있다. 직접적으로 성교를 연상시키지 않는 대상도 포괄하는 단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는 섹스라는 행위에 얽매이는 개념이 아니다. 개인의 의도, 감정, 사회관념 등이 복잡하게 얽혀서 형성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별생각 없이 받아들여질 언행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성적으로 비칠 수 있다. 우연히 흩날린 머리칼의 샴푸향에서 여성스러운 매력을 발견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개인마다 다르고 또 사회마다 다르다. 만일 심리적 기제의 원천을 끊임없이 타고 올라간다면 생물학적 요인을 이끌어낼 수도 있긴 하겠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 기전이 온전히 유전자로부터만 나타나진 않는다는 점이다. 투박하게 번역하자면 '성적인 것' 정도로 쓸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맥락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기도 하고, 글의 간결성을 위해 '~한/인 것'을 쓰지 않기로 노력 중인 내 입장에서는 이 또한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여하튼 본론으로 돌아와 강조하고 싶다. 섹슈얼리티가 태생적으로 경계에 있는 개념임을 말이다. 자신의 아름다운 육체를 자랑하고 싶은 피트니스 인플루언서가 있다. 젊은 날에 누구보다 열심히 가꾼 노력의 결과물을 보이고 싶어 바디 프로필을 촬영했고 위풍당당하게 소셜 네트워크에 업로드했다. 이 게시물에서 섹슈얼리티를 찾을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이 사람의 게시물을 노골적 섹스어필들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성인만화나 야한 챌린지들에 빗대는 게 무례할 수도 있는 이유는 그 인플루언서의 게시 의도가 섹스어필에 가깝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을 직접 들여다볼 수는 없기 때문에 게시자의 의도에 섹슈얼리티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는 100%의 단정은 어렵다. 몸의 노출 정도가 높더라도 그것이 세세한 근육의 모습을 티칭하고자 하는 것인지, 전체적인 비율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인지, 관심 있는 누군가에게 무언의 언지로 성적 매력을 나타내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중 일부나 전부를 모두 욕망하는지 알 수 없다. 나의 가치관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설사 노출증이 있어서 불특정 다수에게 몸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한들 그 마음의 중심을 함부로 확언하고 재단할 권리는 내게 없다.
사실 본인조차 그 감정을 속속들이 확신할 수는 없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앞서 극단적인 예시를 들었지만 섹슈얼리티가 드러나는 거의 모든 게시물은 경계선을 달린다. 적나라한 가사를 가진 팝송에 맞춰 댄스 챌린지를 올린다고 하면 게시자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배경음악에 춤을 추듯 아무 생각 없이 동작에 집중해서 영상을 업로드했지만 댓글에서 누군가 몸매를 칭찬한다면 또 의외로 기분 좋을 수 있다. 다른 경우로 바이럴을 노리고 운동영상을 올렸는데 골반이 어떠니 상체라인이 어떠니 하면 감정이 상할 수 있다. 이처럼 상황은 다양하고 정서는 세밀하기 때문에 여기서 주고받는 욕망들에 대한 엄밀한 판단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크리에이터의 의도가 무엇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오만한 사고방식이다. 그런 성급한 판단에서 나온 매도와 마녀사냥 때문에 피해를 입은 아티스트들을 생각한다면 더욱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게시자의 의도를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역으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접근까지 완전히 유보할 수는 없다. 애매모호함, 바로 그것이 섹슈얼리티를 섹슈얼리티가 되게 한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크리에이터나 인플루언서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단정할 권리는 없고 심판할 권리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콘텐츠 공급자의 속마음을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수요자의 욕망 또한 함부로 왈가왈부될 수 없게 된다. 게시물이 다분히 공공의 영역인 플랫폼에 업로드된다면 게시물에 대해 각자의 느끼는 바가 어떠해야 한다고 마음대로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허가된 사람이라면 그것을 보고 어떻게 느끼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다! 물론 똥 같은 생각을 입으로 뱉거나 댓글로 남기는 건 다른 문제지만... 어찌 됐든 그 사람의 느낌 자체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하다.
섹슈얼리티가 발생하는 틈새, 나아가 강화되는 골짜기가 바로 여기다. 서로의 내밀한 마음을 들춰낼 수 없고, 들춰내서도 안 된다는 것. 공급자는 미필적 고의든, 인식된 실수든, 완전히 의도하든 욕망하는 만큼 성적인 요소를 첨가하면서도 그것을 공식화하지 않아도 된다. 분명 어떤 사람은 정말 일점일획의 성적 의도조차 담지 않았을 수 있지만 콘텐츠 수요자 입장에서는 틈을 가진 여러 게시물들과 '건전한' 게시물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수요자는 어떤 면에서 성적 대상화의 자유가 있다. 게시자의 몸선에서 나오는 섹슈얼리티를 기피하지 않아도 된다. 태평양 같이 넓은 등을 보면 안기고 싶다고 생각해도 되고, 탄탄한 어깨를 보며 기대어 조는 상상을 해도 좋다. 부드러운 살결의 촉감을 상상해도 되고 과감하게는 만져보고자 하는 욕구를 느낄 수도 있다. 여기서는 '개인'에게 자연스럽게 생기는 욕망들에 말하고 있음을 명심해 주길 바란다.
그렇지만 '성적 대상화'와 '자유'의 결합 자체가 너무 파격적으로 보이긴 한다. 보수적인 관점에서도, 일부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도 기겁할 조합이다. 한국적 집단 린치를 당하기 전에 집필 의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성적 대상화에 대한 개념부터 확인해야 한다. 성적 대상화의 자유라는 말이 어불성설처럼 들린다면 연인 간에 발생하는 성적 대상화는 어떠한가? 연인관계는 인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성적 대상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잠자리에서 서로의 페티시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인격적 대우를 잠시 유보하는 경우는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다른 예로 어떤 예술 작품에서 성 상품화의 이면을 비판하기 위해 관람자로 하여금 불편한 성적 대상화의 경험을 하도록 유도한다고 하자. 그 경우에도 성적 대상화가 허용되면 안 될까? "에이 건전한 의도나 관계에서 나타나는 건 성적 대상화가 아니야!"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땡큐다. 지금 바로 그 경계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성적 대상화의 자유가 선을 넘지 않도록 돕는 장치들이 있다. 인류애, 예의범절, 사회적 금기 등등. 하지만 가장 우선되는 기준은 콘텐츠 게시자의 의도이다. 자유롭게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라면 게시물의 적절한 시청 방식에 대해 명시적으로 요청할 수 있다. 현대 민주국가에서 섹슈얼리티를 향유하는 기반은 헌법상 성적자기결정권으로 표상되는 개별 주체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역을 세분화하는 작업이 그리 녹록지는 않다. 법적인 개념으로서 '위력'도 확립되고 있지만, 사실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의도, 주체와 권력의 문제는 법에 선행하는 '사회'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섹슈얼리티가 포함되는 가장 직관적인 행위인 성관계만 살펴보아도 그렇다. 법체계는 섹스에 있어서 상대방의 '동의(consent)'를 연령, 지적능력, 의사표시와 같은 표준화된 요소로 측정해오고 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발생하는 역동적 상호작용을 법의 테두리로 완전히 해체할 수는 없다. 평소 맑은 정신에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불가피한 상황을 만들어 로맨틱한 장소에 방문하는 남자친구의 행동, 적당한 취기에 오르도록 조심스럽게 유도하는 여사친의 설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매력을 과장하여 전달하는 소개팅 상대방의 전략과 같은 요소를 일일이 규범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인격 대 인격 관계에 있어서는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들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고 개인 선택의 영역에 둔다.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만 사실관계를 따져 온전한 선택권이 보장됐는가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기 모호한 국면이 분명히 있다. 의도가 명시적이지 않았거나, 표출된 의도가 다르게 이해되는 경우에 진의를 확인하려다 보면 결국 둘의 관계성이라는 주체와 권력의 문제에 이르게 된다. 시나리오는 다양하다.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여도 누군가는 동아리와 향후 필드까지 겹치는 좁은 울타리의 밀접한 관계일 수 있고, 다른 이는 그저 얼굴만 알아서 언제든 손절할 수 있는 얕은 관계일 수 있다. 동일한 업무상 상하관계여도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아니면 실상 같은 처지라고 부를만한 팀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당한 성관계였는가를 판단할 때에도 따져볼 요소가 이렇게 많은데, 하물며 한층 더 포괄적인 개념인 섹슈얼리티에 관한 자유를 판단하기는 얼마나 더 복잡할까. 법리라는 최소한의 울타리 안에서만 다루어도 벌써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을 자유가 얽혀 명징한 판단을 방해한다. 더 나아가 본연적인 사회작용으로서 섹슈얼리티를 제대로 다루자면 논문 몇 편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으리라. 그러나 현대의 소셜 미디어가 섹슈얼리티의 판단을 유독 어렵게 만드는 한 가지 확실한 원인은 우선하여 서술할 수 있다. 주체의 '불특정 다수성'이라는 특징은 다양한 소셜미디어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는 명시적으로 게시 의도를 표출하는 경우가 좀처럼 없기 때문에 더더욱 주체의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섹슈얼한 의도의 애매함이 콘텐츠 생산과 소비를 수행하는 주체들의 특성과 관련하여 섹슈얼리티의 난점을 심화시킨다. 앞으로 쓰겠지만 바로 여기서 섹슈얼리티가 불편해지는 단서도 찾을 수 있다. 성적대상화의 자유가 미디어 환경의 '불특정 다수'라는 주체 특성과 만나 불쾌한 포만감으로 바뀌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의 한편에는 익명성의 뒤에서 자유롭게 관음하는 수요자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알고리즘을 타고 보여지는 무작위의 공급자들이 있다.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익명성과 무작위성이 아니다. 자기 이름을 건 계정으로 콘텐츠를 찍어 올리는 크리에이터들도 많고, 소통을 시도하는 현실 자아의 팔로워들도 많다. 그럼에도 그들이 서로를 '불특정 다수'처럼 느끼게 되는 것은 플랫폼 미디어의 구조 때문이다. 콘텐츠 공급자는 플랫폼이라는 '빈 공간'을 채우는 재료이다. 거대 미디어 기업의 입장에서 그들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 설사 "미스터비스트" 같은 초거대유튜버가 사생활 논란으로 인해 채널을 폐쇄한다고 해서 유튜브의 지위가 중차대한 타격을 받진 않을 것이다. 개별 콘텐츠 카테고리를 채우는 특정 규모 이하의 크리에이터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저 유튜브라는 거대 플랫폼에 무작위로 조달되는 상품인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자기의 취향을 채워주기 위해 튀어 오르는 화수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언제 비었을지 모르는 빈칸, 그곳은 다르게 보면 언제든 채워질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의 공간이다.
크리에이터의 관점에서도 시청자와 구독자는 현실의 인격과 관계가 있든 없든 그저 '원오브뎀'으로 전락한다. 당연히 초창기부터 구독해 온 찐팬들이 크리에이터 개인에게는 특별한 소수로 기억될 수도 있다. 그러나 채널 성장을 목적으로 한다면 결국 대상되는 청중(target audience)은 불특정의 다수가 될 수밖에 없다. 미디어 생태계는 소수 찐팬들을 위해 다수 소비자를 저버리는 채널이 도태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미디어 기업은 조회수와 구독자수, 상호작용을 핵심성과지표로 삼아 이를 바탕으로 광고수익을 획득한다. 자체 쇼핑몰이나 커뮤니티 운영 등으로 몇몇 채널이 성공할 수는 있어도,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업이 해당 비즈니스 모델을 전체적으로 도입할 수는 없다. 이에 따라 크리에이터들에게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은 관찰되지 않은 파동처럼 가능성의 형태로 존재한다. 언젠가 나의 콘텐츠 영역에 방문하고 구독자, 팔로워가 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불특정다수의 구조 안에서 개별 선택의 자유는 배제된다. 섹슈얼리티 생산과 소비가 원천 봉쇄되지는 않지만 그 양상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콘텐츠가 소수의 인원을 대상으로 하거나, 특정된 집단을 염두하는 경우에 이들의 니즈를 반영하여 생산자가 섹슈얼리티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린이나 초등학생이 시청자층인 경우가 명확하다면 교육적 목적 이외에 섹슈얼리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청소년 시청 제한 영화를 리뷰하는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한다면 자유롭게 섹슈얼리티가 포함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콘텐츠 소비자가 타겟될 수 없는 예측불가의 다수로 바뀌는 순간 섹슈얼리티의 생산자는 그 기준을 잃는다. 근육의 세세한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해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찍은 영상이 운동 애호가와 관음증 환자에게 모두 전달된다. 예술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찍은 영화의 베드신이 영화평론가와 욕구를 풀려고 야한 동영상을 찾는 사람 양쪽에게 쉽게 제공된다. 앞의 콘텐츠가 각각 운동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프라인 티칭 강좌와 독립영화제에서 방영될 것을 예상하고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보면, 그 양상이 플랫폼에서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노출이 많은 배역을 맡았다는 이유만으로 소셜 미디어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배우의 심정을 떠올려보자. DM으로 스폰 제의를 받고, 움짤이나 유출 클립이 돌아다니고, 댓글로 인신공격을 받는다. 불특정다수라는 그룹에 속한 익명의 시청자 1은 별다른 죄책감 없이 그런 공격을 실행할 수 있다. 인격 대 인격의 관계가 아니라, 권력 대 대상이라는 구도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섹슈얼리티를 담아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은 그렇게 불합리한 공격에 처할 위험을 감수하거나 자기표현의 자유를 제약받는 딜레마에 처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선택의 자유가 제약되기는 마찬가지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고객의 취향에 맞는 옷을 찾아주기 위해 맞춤 제작품을 가져오는 VIP룸이 아니다. VIP룸은 고객의 선택과 개인취향에 의존하지만 알고리즘은 고객의 취향보다 더 중요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바로 게시물과 영상의 퍼포먼스이다. 사람들이 더 많이 클릭하고, 더 오래 머물고, 더 열심히 상호작용한 게시물이 추천된다. 화제의 기성품을 요란스럽게 판매하는 팝업 스토어에 가까운 것이다. 여기서 콘텐츠의 섹슈얼리티는 애매성을 타고, 또 어떤 때는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자신의 콘텐츠를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콘텐츠를 도달시키기 위해 섹슈얼리티를 첨가한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기에 그것은 더없이 효과적인 전략이 되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수요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것을 주면서 호응을 얻고, 섹슈얼리티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자기 콘텐츠의 오리지널리티를 부각하면 된다. 보장된 수요가 항상 있기 때문에 섹슈얼리티만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터들도 이미 많다. 이렇게 섹슈얼리티가 불특정다수성을 타고 휘몰아치게 되면 다수 콘텐츠 소비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섹슈얼리티에 노출된다. 조회수를 끌어모으기 위해 성적인 콘텐츠를 난립시키거나 자신의 콘텐츠에 어떠한 형태로든 섹슈얼리티를 포함시킨다면 수요자가 그것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들이닥치는 광고의 홍수를 대처할 수 없듯이, 소비자가 섹슈얼리티를 선택하지 않을 권리는 융해된다.
생산자 입장에서는 소비자가, 소비자 입장에서는 생산자가 끝없이 이어지는 다수이다. 그래서 소비자는 생산자를 선택할 수 없고, 생산자는 소비자를 선택할 수 없다. 시청자는 다른 채널 보면 그만이고, 생산자는 특정 시청자층만 타깃으로 하는 마이웨이를 밟으면 그만일까?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는 착각은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AI 알고리즘의 블랙박스를 열어볼 수 없듯이 미디어에서 솟아나는 콘텐츠와 수요자의 화수분을 분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두 채널을 피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욕망을 정조준하고 물어뜯는 게임의 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욕망의 바다에 서서 할 수 있는 건 온몸으로 파도를 맞든, 아니면 안전한 섬으로 피하든 둘 중 하나다. 즉, 섹슈얼리티의 홍수를 피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미디어라는 철창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떠날 자유가 있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너에게 선택권이 있어! 누가 칼로 협박했니?". 고립될 선택의 권리, 갈라파고스섬에 갇힐 수 있는 자유! 그런 자유 때문에 스스로가 자유하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면 별로 가까이 두고 싶지는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