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말 말고 밥이나 먹어"
한국에서 태어나 이 말을 한 번도 안 듣고 자란 아이가 있을까? 한국인에게 식사는 신성하다. 예절은 밥상머리에서부터 시작되고, 가족은 함께 식사를 하는 '식구(食口)'를 기준으로 한다. "밥 먹었어?"가 인사일 정도면 사람들이 먹는 일에 얼마나 전문가일까!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이곳에서 감히 식사에 관한 글을 썼다. 잔말 말고 밥이나 먹지 거창하게 한국인의 입맛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고나리질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Food police'는 분명 아니다. 먹잘알 한국인에게 어떤 음식을 먹어야 되는지 설교하고 싶은 생각은 아주 없다. 그 의도만은 잘 전해졌길 바란다. 음식에 대한 평론이 아니라 식문화에 담긴 욕망에 관한 에세이를 쓴 것이니 말이다. 허나 한국 식문화의 방향성에 대해 나름의 바람이 아예 없지는 않다. 우리의 식을 주도하는 모멘텀이 질주하는 식욕이기보다는 온전히 향유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었으면 한다. 욱여넣기보다는 음미하고, 과하기보다는 차분했으면 좋겠다. 음식보다는 먹을 때의 상태에 대해서 말한다.
같은 한국에서 살면서 똑같이 먹는 것에 대해 반추하더라도 나와 판단은 다를 수 있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식에 대한 욕망이 나의 이해와는 사뭇 다르다고 느낄 사람이 반드시 있으리라.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음식의 변형이나 조합,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식문화를 보며 끝없는 욕망의 현현보다는 따뜻한 정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 관점이 있다면 나로서는 더 환영할 일이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같은 세계에 다른 욕망을 투영할 자유를 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식사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고 거기에 투영하는 욕망에는 수많은 대안이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마태는 기록한다. 내 글을 읽고선 '한국 음식의 변형이나 먹방은 영 잘못됐으니 없어져야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됐다면 나와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두길 바란다.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행위에 투영되는 욕망이 비틀릴 수도 있음만을 말했다. 심지어 그 비틀림에 대한 기준도 나의 주관적인 견해에서 나온 것이니.
그리고 나 또한 우리 식문화의 본류는 그 비틀린 욕망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최근 ⟨흑백요리사⟩ 결승전에서 그 의미를 되새겨 준 이균 셰프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를 덧붙인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담아낸 요리가 떡볶이 디저트라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떡볶이는 앞서 언급한 한국 식문화의 모든 특성을 수혈한 음식이다. 온갖 실험의 대상이 되어 변화를 거듭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다른 음식과의 조합이 필수적이다. 먹방에서는 분식 0순위에서 빠진 적이 없고 야식과 배달음식으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다. 한국 사회에 충만한 식욕과 갈증이 병존한다고 가정한다면, 떡볶이는 최선두에서 그 둘의 포화를 받고 있는 몸이다. 단순히 맛이나 영양면에서 생각할 때도 떡볶이가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우수한 식품이라고 보기도 쉽지 않다. 어느 평론가가 혐오해 마지않듯이 어쩌면 양념에 버무린 탄수화물 덩어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른 준수한 한식들을 제쳐두고 굳이 떡볶이를 대표 K-푸드로 삼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떡볶이를 이균 셰프가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이균이 주목한 것은 인공적인 단맛도, 떡볶이에 반영되는 비틀린 식욕도 아니다. 그는 다 먹지 못하고 남길 만큼 주는 후한 인심의 떡볶이에서 "풍족함과 사랑,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라는 한국 식문화의 특성을 발견한다. 떡과 오뎅, 양념이라는 물리적 객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신, 그중에서도 우리가 점점 잃어가는 정수를 읽어낸 것이다. 한국 식문화에서 나타나는 그 넉넉한 마음은 최근에 보이는 '풍족한 배고픔' 이전부터 존재하던 레거시이다. 이는 비틀린 욕망과는 반대의 양상으로 찾아온다. 남기도록 풍성히 주는 떡볶이는 '내 안에' 더 많이 욱여넣기를 원하지 않고, '상대방'이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에서 탄생했다. 자신의 끝없는 식욕을 돌아보기보다 상대방이 맛있게 먹고 있는지 확인하는 살핌이 먼저이다. 충분히 먹고 남기도록 많이 주는 것도, 준 상대방을 생각해서 몇 점 남기는 것도 모두 그 따스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그런 온정이 있을 때 오히려 우리는 배부르다. 식욕에의 갈구함이 선사하는 배고픔과는 반대이다.
우리 사회에 떠도는 식의 욕망이 본래는 사랑이라는 형태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변질되어 지금의 비틀림으로 남아있는 것이라면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책제목처럼 "오래된 미래"가 다시 나아가야 할 길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오래된 미래의 표본이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오는 정겨운 옛식탁이 그것이다. 소박하든 풍성하든 음식에 관계없이 공동체가 서로 함께하는 안부인사 같은 식문화였다. 그렇다면 욕망에 의해 전복된 사랑을 다시 전위하여 더 큰 애정으로 만드는 게 우리의 사명이리라.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이균 셰프의 해석처럼 지금 우리 식문화에 그 사랑이 이미 함께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는 떡볶이를 보며 지금도 사랑을 읽어내지만 나는 그것을 둘러싼 욕망들에 주목했듯이, 우리 사회에 이미 충만한 사랑이 화려한 욕망들에 함몰되어 보이지 않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그저 나의 편협한 시각이 이를 포착하지 못한 것일지도... 현상을 비판하는 사람에 머물기보다 좋은 갈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썼기에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사랑에의 갈망은 가장 좋은 욕망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담아 이야기하면 탐욕(cupiditas)은 세상의 모든 것들과 함께 스러져갈지라도 사랑(caritas)은 영원할 것이다. 탐욕의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다. 내가 소유하고 싶고 내가 먹고 싶은 것에 주목한다. 자아의 연장선에서 대상을 인식하고 내욕망을 중심으로 상대방을 이해한다. 자신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커서 상대방이 안중에도 없는 경우도 많다. 반면에 사랑은 상대방을 나에게 투사한다. 상대방을 나처럼 생각하고 상대방을 먹이기 위해 골몰한다. 다른 사람이 더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요리사이였기에, 이균은 그 사랑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으리라. 그렇다면 좋은 욕망은 스스로 만들어내기보다 전해받고 전해주는 것이다. 내 안에서 나오는게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받은 사랑을 통해 진정 좋은 욕망이 무엇인지 눈 뜨게 된다. 이를 전달해 주는 것만으로 상대방은 그 사랑에의 갈망을 느끼게 된다. 사실 그 이외에 좋은 욕망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없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싸주시던 김밥이 기억이 난다. 말 그대로 김과 밥. 밥에 잘 구운 김만 쌌으니 밥김이라고 불러야 합당하다. 반드시 아침밥을 먹어야 된다는 사고로 무장하셨던 것인지, 채 다 부비지 못해 부은 눈으로 앉아있으면 하나하나 싸서 입에 넣어주셨다. 고소한 냄새,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가락 사이로 삐죽 나온 까끌까끌한 김의 표면, 짭조름한 맛과 씹을수록 단 밥알까지... 그 감각에 각인된 것들이 모두 사랑일 것이다. 주고받았던 대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말을 쫑알대곤 하려면 어머니는 꼭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잔말 말고 밥이나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