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뉴미디어를 빠뜨릴 수 없다. 보다 날 것의 욕망은 올드미디어보다는 뉴미디어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뉴미디어에서 가장 극적으로 한국 식문화에 담긴 심리를 확인할 수 있는 키워드는 먹방이다. '먹방(Mukbang)' 종주국 한국에서 살다 보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가끔은 이 문화가 기괴하게까지 느껴지곤 한다. 이 감정은 특정 크리에이터에게 향한 것이 아니다. 먹방 문화 전반에 깔려 있는 욕망들을 겨냥한다.
먹방이 인기를 끌기 한참 전 푸드파이팅 대회를 시청한 적이 있다. 푸드파이팅은 완전히 스포츠였다. 차력쇼를 방불케 하듯 신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선수들이 모였다. 경쟁자보다 빠르게 많이 먹기 위해서 핫도그를 물에 적셔 꿀떡꿀떡 삼키는 모습이 마치 발할라 입성을 위해 싸우는 전사처럼 보이더라. 그야말로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었으니 맛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먹방은 이와 많이 달랐다. 먹방에서 많이 먹는 건 상당히 중요한 흥행요소이기는 하지만 전부가 아니다. 먹방은 많은 음식을 무작정 욱여넣지 않는다. 방송 진행자가 음식이 어떤 맛인지 설명하고 맛있음을 계속해서 어필하는 과정이 반드시 들어간다. 그저 많이 먹는 게 아니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넉넉하게 보여주기에 초점이 있다. 즉, 보는 사람의 식욕 자극이 먹방의 우선적인 목적이다. 카메라에 반 이상을 차지하는 큰 접시에 우리가 다 아는 맛인 음식들이 한가득 담겨있다. 색을 선명하게 해주는 필터를 쓴 것인지 열에 아홉은 강한 색조의 대비로 빨강, 주황, 노랑의 빛을 보여준다. 쭈욱 늘어지는 치즈나 맵고 시고 단 양념을 보고 있자면 침샘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맛과 향은 어쩔 수 없이 상상의 영역에 맡기지만 소리까지 배제할 수는 없어 ASMR로 먹는 순간순간을 전달한다. 이런 자극을 동반하기 때문에 주로 식욕이 선명해지는 밤에 대리만족을 위해 시청하게 되기 마련이다. 식사시간에 입맛을 돋울 겸 메이트로 먹방 크리에이터가 나온 화면을 놓기도 한다.
먹방은 행위가 아니라 욕망의 동기화를 추구한다. 시청자가 실제로 먹고 있지 않음에도 먹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 포인트다. 맛있는 음식을 가득 넘치도록 먹고자 하는 욕망이 크리에이터의 먹는 행위에 투사된다. 이 순간만큼은 크리에이터들이 하나의 제의(祭儀)를 수행한다고 볼 수도 있다. 군침 도는 음식을 채워 넣는 작업을 통해 보는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지만, 여기서 내가 가장 이상하게 여기는 부분이 생긴다. 먹는 사람이 자극하고 보는 사람이 충족하고자 하는 그 욕망, '식욕'이 실제 섭취에 대한 욕망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명 시청자의 배는 채워지지 않는다. 또 시청자가 물리적 포만감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먹방을 보면 식(食)의 욕구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큰 욕망을 느끼게 된다. 내일은 꼭 저 음식을 먹어야지, 월급이 들어오면 꼭 저 식당에 가봐야지,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자연스럽다. 음식을 먹으면서 먹방을 볼 때에도 욕망이 쉽사리 채워지지는 않는 듯하다. 현재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의 맛과 포만감에 충실하지 않고, 방송에서 보는 음식을 향해 욕망을 투영하는 과정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음식을 먹고 있지만 저 음식도 맛있겠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이 괴리는 굴비를 걸어놓고 밥만 떠먹는 자린고비의 심정과는 사뭇 다르다. 자린고비는 굴비 맛 재현하기를 일차적인 목적으로 할 것이다. 굴비를 쳐다보고 있는 상태에서 밥알을 한술 뜬 뒤 두 눈을 딱 감으면, 밥알에서 굴비 맛이 나든 아니면 굴비를 얹어먹은 것과 같은 맛이 나기를 기대해야 말이 된다. 반면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치킨 먹방을 보는 사람은 자기가 먹고 있는 라면에서 치킨 맛이 나기를 기대하진 않는다. 애초에 시각과 미각의 혼동에서 오는 착각이나 상상적 재현이 목표가 아니다. 크리에이터가 치킨을 먹을 때 느낄 그 식욕, 그 먹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는 것이 시청의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당장 충족되지 않을 욕망, 즉 일종의 '갈증 상태'에 진입하기 위해 먹방을 본다는 괴이한 결론이 나온다. 즉 배부름에의 욕망이 아니라 '먹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먹방을 본다. 시청자가 배고픔이라는 생리적 상태를 바란다는 의미가 아니다. 맛을 느끼고 영양분을 채워 넣는 게 사람의 본능인데 거식증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욕망의 상태로 보았을 때는 '배고픔'을 지향한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욕망은 일반적으로 달성을 목적으로 하는데, 당장 달성되지 않을 욕망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배고픔'을 지향한다는 의미이다.
궤변처럼 느껴지는 이 발상을 논파하기 위해 두 가지 해명을 시도해 본다. 첫째는 먹방을 보는 사람이 대리만족을 통해 식욕을 해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많은 다이어터들이 자신과 다르게 마음껏 폭식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를 보며 대리만족을 꾀한다. 하지만 타인이 먹는 모습을 통해 실제 배고픔을 해소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이색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현실의 자기 혀에는 보고 있는 음식의 맛이 나지 않고, 자기 위에 그 음식이 들어가지 않는데 어떤 방법으로 뇌가 만족의 전기 신호를 수신할 수 있을까? 크리에이터가 멘탈리즘 마술이나 영험한 우주의 기운을 사용할리도 만무하니 결국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만약 대리만족이 참으로 가능하다면 보는 사람이 시청하는 순간에 먹는 사람을 자아의 연장선으로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처럼 뇌가 상대방을 자기 신체의 일부로 혼동하기 때문에 타인의 먹는 행위에서도 만족감을 느끼게 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 자체가 욕망의 동기화라는 먹방의 본질을 지지하는 증거가 된다. 보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함께 배고프고 함께 식욕을 느껴야만 그 만족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리만족을 통해 배부름의 욕구를 해소할 수도 있다고 가정해도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식욕을 투영하는 자아가 있는 것이다. 집에서 곧바로 밥을 한술 뜨지 않고 먹방을 보는데에는 물리적 배고픔에 대한 충족보다 식욕에의 감각을 우선한다는 심리가 숨겨져 있다.
다음으로는 '나중에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들 수 있다. 갈증의 상태보다는 욕망의 충족 시간을 지연하는 데에 목표로 둔다. 욕망은 곧바로 달성될 때보다 일정 시간 묵힌 뒤 이루어졌을 때 더 큰 쾌감을 주기에 미리 먹방을 본다는 발상이다. 밥때가 돼서 아무 생각 없이 배달시킨 파스타보다, 전날 먹방을 보며 꼭 먹어야지 다짐했던 파스타가 더 맛있게 느껴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욕망의 지연이 왜 더 큰 쾌감을 주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단순히 시간을 미룬다고 해서 욕망이 더 커지고, 상응하는 쾌락도 증가하지는 않는다. 운동으로 땀을 쭉 빼고 오고 싶었더라도 잠깐 침대에 눕는 사이 그런 욕구가 금방 사그라드는 경우처럼 말이다. 만족의 연기가 더 큰 즐거움으로 이어지는 건 기다리는 시간 동안 욕망이 첩첩히 누적되면서 강렬해질 때이다. 그리고 욕망의 중첩에는 분명히 억압이라는 중심 원리가 있다. 지금 이 순간 먹지 못하기에 내일의 음식이 더 기대된다. 오늘 밤 침을 꼴깍 삼키며 잠에 들면 내일 주문 직전에는 먹고자 하는 욕구가 더 생생하게 차오른다. 그런 구속을 전제로 할 때만 디오니소스 축제처럼 무의식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욕망을 설명할 수 있다. 더 큰 쾌락을 위해 억압을 자처하는 시도는 앞서 말한 '배고픔'에 자발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의 이면일 뿐이다.
앞의 글에서 우리나라 식문화에 대한 지향이 '풍성함'이라고 언명했음을 생각하면 이 모순은 심화된다. 충만한 감각을 추구하는데 역으로 배고픔의 국면에 처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먹방을 통해 만족시키고자 하는 감각은 차고 넘치는 식욕이다. 음식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며 배가 부를 때까지 들이켠다. 기름지고 감칠맛 나고 맵고 짠 복합적 미감을 자극한다. 검증된 조합을 업그레이드하여 한층 다채롭게 만든다. 그런데 먹방을 보면서 실제로 처하는 감각은 욕망의 갈증상태, 배고픔인 것이다. 더 맛있는 요리, 더 다양한 조합, 더 넉넉한 양을 볼수록 더 큰 배고픔을 느낀다. 보다 풍성한 감각에 대한 지향이 허한 감정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풍성한 배고픔' 또는 '배고픈 풍성함'이라는 이율배반의 명제가 성립된다. 실감할만한 일상어로 바꾸자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어울린다. 많은 물을 부으려 큰 독을 준비하지만 붓자마자 빠진 밑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간다. 가득 채우려고 할수록 항상 더 큰 빈칸을 만들어낼 뿐이다. 길거리에 떨어진 부적처럼 손대지 말아야 될 주제를 건드린 것 같지만 욕망의 심연을 들춰내는 일 또한 먹방을 볼 때처럼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
식문화 카테고리에서 먹방과 가장 많이 기시감을 느끼는 영역은 음주 문화이다. 잠시 그 주제로나마 환기를 해보아야겠다. 나는 젠지(Gen Z)의 '소버 라이프'가 도래하기 전 술문화를 접한 90년대생이기에 구시대의 술문화를 경험하는 마지막 세대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 특별히 한국에서 직접 겪은 술문화는 다음 세대에 전해줄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술을 전투적으로 마시는 사례가 흔하진 않다. 날씨가 추운 동부유럽권을 제외하면 OECD 주요국 중 상위의 음주량을 가졌을 뿐 아니라, 높은 도수의 술을 섭취하는 비중으로 따지면 더 위험 수위에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려스러운 부분은 술을 어떤 방식으로 음용하는가이다. '마시면서 배우는' 술게임 문화는 젊은 나이부터 술에 대한 경각심을 없애는 데 기여한다. 새 학기 엠티에 가서 필름이 끊기고, 구토를 하며, 난동을 부리거나, 기어 다니고, 결국에는 인사불성으로 뻗는 모습은 다른 술자리에서의 씹을 안주 정도 되는 작은 흠이었다. 실컷 공부하고 들어온 대학, 젊을 때 더 놀라며 무절제한 음주를 권하는 선배와 어른들은 지금도 많다. 증상과 중독성, 유해성 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대마초에는 그렇게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어르신들이 술에는 어찌 그리 관대한지 놀랍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문화가 아니던가. 취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던 체험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호기로운 젊은 날의 추억이다. 주변에서 금융권, 법조계에 취직한 친구들을 보면 이런 습관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는 것 같다. 특정 직군에서는 직급이 올라갈수록 술자리가 중요해지는 현상이 여전히 공고한 것을 보면 말이다.
1차, 2차, 3차까지 쭉 달리는 문화도 한 수 거든다. 안주를 바꿔가며 술과 대화의 농도를 높여가야 되니깐... 취기는 나른하지만 행동은 취한 정신을 향해 질주하는 양상이랄까. 엔간히 절제하는 사람도 그 노선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탑승하는 순간 자기를 지키기 어렵다. 마시면 마실수록 술을 더 부어야 하고, 술잔을 채워도 채워도 계속 비워야 한다. 더 밀어 넣을 수 없는 상태까지 나를 몰아붙이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다. 다음날 잠에서 깨면 이는 강한 허기에 "다시는 먹지 말아야지"라고 소리치지만, 언젠가 또 그 허기를 향해 달릴 게 분명하다. 해장으로 먹는 라면의 시원함을 기억하기 때문일까? 내일의 음식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 오늘 먹방을 보는 그 심리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언뜻 관계없어 보이는 야식 문화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배달 인프라가 발달한 탓도 있지만 유사한 조건의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도 한국 야식에 더 강렬한 느낌이 있다. 유행하는 메뉴는 확실히 묵직한 편이다. 양이 많고 기름지고 자극적인 맛이다. K-술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안주뿐만이 아니라, 흔히 집에서 시켜 먹는 야식만 봐도 그렇다. 마라탕, 배달떡볶이, 햄버거 등을 시켜서 포만감을 끝까지 느껴야만 제대로 된 야식 취급을 받을 수 있다. 고구마 말랭이나 샐러드는 허기를 간신히 달래는 간식일 뿐이다.
특히 수험시기에 있는 학생들이 야식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한다. 푸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왕성한 식욕을 음식에 투사하는 건 아닐까? 질주해야만 하는 한국 사회를 처음 경험하는 학생들이기에 야식을 즐기는 식습관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지 가끔은 안쓰러울 때가 있다. 맵고 짜고 단 음식을 통해 말초신경에 쾌감을 주입하는 모습을 보면 철도 씹어먹을 위장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연민의 모습으로 보아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먹는 사람이 행복한데 뭐 어때? 하지만 제일 좋은 걸 주려고 노력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식습관이다. 야식을 먹으면 그다음 날 같은 시간에 허기를 느끼게 된다. 분명 넉넉히 음식을 먹는 행위인데, 더 강렬한 식욕을 느끼게 하는 역설에 처한다. 수면의 질이나 소화장애 같이 육체로 확인할 수 있는 건강도 중요하지만, 그 허기짐에 대한 감각 또한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먹방과 술, 야식 문화에서 느끼는 이 감정을 응축해 낼 때, 나에게도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편린들이 있다. 새벽녘에 입맛을 다시며 음식 영상을 찾아볼 때의 그 날선 신경이 생생하다. 밀려오는 허기에 다른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먹을 음식을 생각하는데만 생각을 소모한다. '먹을까 팀'과 '말까 팀'의 치열한 줄다리기 끝에 거의 언제나 '먹을까 팀'이 승리한다. 그렇게 쟁취한 음식의 첫 한 입은 공복을 채우는 행위 이상의 카타르시스를 준다. 절정의 만족감이 혀와 머리카락을 동시에 타고 내려오기 때문이다. 손은 그 찰나의 쾌감이 행여나 가실까 곧바로 한 숟가락을 더 떠 입으로 가져간다. 연속 동작으로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지만 무언가 허전하다. 입이 터져버린 것이다. 평소를 기준으로 할 때 분명 적당한 식사량이었음에도 좀처럼 배부르지 않다. 아니, 배는 분명 찼지만 여전히 배고프다. 결국 내달리는 욕구를 멈추지 못하고 이미 먹은 양 이상의 간식으로 손을 가져간다.
OO이가 좋아하는 랜덤게임! 무슨 게임? 벌써 100번도 넘게 주문을 외우며 팔을 휘저었다. 지면 마시고 이기면 멕이는 그 단순한 룰이 그렇게 재밌을 수 없다. 얼굴이 빨간 친구, 눈동자에 초점이 나간 친구, 심지어 그 자리서 그대로 잠든 친구도 있다. 그 아기자기한 모습들이 흥을 더 돋운다. 아차, 딴생각하는 사이에 벌주에 걸렸다. "마셔 마셔 먹고 죽어!". 자동으로 플레이되는 브금에 잔을 멈출 시간이 없다. 한참을 마시다 정신을 차리면 이미 쓰러진 전우들이 한 둘이 아니다. 최후의 승리팀을 가려내려 끝까지 달리는 생존자들을 피하려다 선배와의 진지한 대화 자리로 잘못 와버렸다. 대화는 나른하고 지루하지만, 그럴수록 술잔은 멈출 수 없다. "무리하지 마, 안 마셔도 돼"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시는지, 그 염려의 겉치레 또한 쉬지 않고 반복한다.
즐겁게 간직하는 추억들 사이로 순간순간 느꼈던 불쾌한 감정들도 동봉되어 있다. 입과 위는 가득 찼지만 허탈했던 마음, 그 씁쓸한 뒷맛이 지금도 느껴진다. 풍성한 배고픔에 대한 감각, 충만한 갈증의 상태를 지금도 분명히 기억할 수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