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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올리브 Oct 22. 2024

K-맛있다

우리의 '맛있다'는 감각은 어디서 나타날까? 챗지피티처럼 두뇌로만 세상의 미감을 파악하고 첨언할 수도 있다만 아무리 똑똑한 인공지능이라도 현시점에서는 '맛있다'의 진의에는 이르지는 못한다. 식품 분자구조의 형태나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에서 단서를 찾아도 한계가 있다. 특정한 맛이 난다고 해서 그 맛이 모든 사회, 모든 사람에게 일관된 정도로 '맛있다'고 느껴질 리 없기 때문이다. 먹는 사람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언제 맛있다고 하는지는 확인할 수 있지만 무엇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맛있음을 느끼게 하는지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없다. 


주관적인 감정으로서의 '맛있다는 느낌'을 온전히 다루기 위해서는 그 안에 담긴 욕망을 이해해야 한다. 음식을 섭취하기 전에 어떤 감각을 기대하는가. 담백하고 슴슴하되 고소한 향, 칼칼하고 짭조름한 국물의 목 넘김, 혓바닥을 가볍게 누르는 바디감, 그것도 아니면 입을 얼얼하게 만드는 새큼달큼함? 또 어떤 방식으로 충족되는지도 중요하다. 기대하지 않았던 반전으로 다가오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한껏 스포일러를 내보낸 익숙함으로 다가오길 원하는지. 취식이 완료된 시공간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도 빠질 수 없다. 전여친과 기념일을 보낸 고풍스럽고 로맨틱한 분위기의 파인다이닝이었는지, 서비스가 개판이어서 재방문의사가 전혀 생기지 않은 무늬만 대박 식당이었는지, 여행 간 친구들과 얼큰히 취한 상태에서 누빈 나른함의 공간이었는지에 따라 맛에 대한 감각 또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우리의 감각 또한 훨씬 더 정교한 수준으로 디지털화되어서 속속들이 기록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저 욕망의 실타래도 모두 풀려서 한가닥 한가닥이 전부 계량될 수 있으리라. 마침내 '맛있다'는 감각도 하나의 데이터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이다! 오늘까지는 사람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래서 "대체 무엇을 볼 수 있느냐"라고 곧바로 묻는다면, "양적연구나 할 것이지 뭣하러 정치사상하냐"라는 질문을 들은 대학원생처럼 땀을 삐질삐질할 수밖에 없다. 고심 끝에 담론이니 맥락이니 어려운 단어를 주저리주저리 나열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실상은 스스로의 감각과 욕망만 온전히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니깐. 조금 양보해서 그 주관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고를 요리조리 조립해 보는 시도, 딱 그 정도만 더할 수 있겠다. 다소 무력하지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한다. 이 글을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자기반성적으로 쓰는 이유이다.


앞서 언급한 한국 음식 변형의 소위 '뇌절'을 싫어한다. 그럼에도 막상 먹었을 때 맛있다고 느낀 적도 적지 않다. 아니,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기똥찬 쾌감을 느낄 때가 너무 많다. 한 번은 친구가 유명 도넛집에서 정말 크림이 한가득한 도넛을 사 온 적이 있다. 도넛에 크림을 추가했다기보다는 크림에 도넛을 얹은 듯한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는데, 가뜩이나 튀긴 빵에 지방 그 자체인 크림을 넣었다는 점에서 혈관 건강이 걱정될 정도였다. 보나 마나 느끼하고 너무 달진 않을까 의심했지만 사온 성의를 생각해서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의외로 달달함과 고소함이 끝도 없이 밀려들더라. '폭력적인' 맛이었다. 일부 음식들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음을 그때 깨달았다. 한없이 늘어나는 치즈로 눈과 입을 즐겁게 하고, 꾸덕한 초코를 덕지덕지 발라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그 원초적 전략이 먹히기 때문이다. 그 자극적이고 충만한 감각이 맛있다는 느낌과 자주 동일시되는지도 모른다.


음식도 분명 확립된 조합을 따라먹었을 때 맛있다. 먹잘알들이 만들어 놓은 '거인의 어깨'가 따로 없다. 그런 이유로 중국집서 회식할 때 나를 제일 섭섭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탕수육을 시켜주지 않는 상사이다. 짜장이든 짬뽕이든 그날 기분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면 메뉴 통일에는 큰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탕수육을 주문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다. 유린기나 깐쇼새우를 바란 것도 아닌데 어떻게 탕수육마저 시키지 않을 수가 있나 서러움이 차오른다. 탕수육 없이 먹는 짜장, 짬뽕은 분식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아무리 허섭한 부스러기 탕수육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탕수육이라는 요리 메뉴가 있어야 짜장과 짬뽕까지 참 식사가 된다. 물론 서비스 군만두도 기본이다. 탕수육만큼 섭섭하진 않지만 모름지기 꼭 같이 먹어야 되는 조합들은 끝도 없이 떠올릴 수 있다. 닭한마리에는 떡과 칼국수 사리, 제육에는 계란 후라이와 MSG가 가득한 국물, 냉면에는 고기나 만두, 김치찌개에는 계란말이, 회에는 한국식 스끼다시와 매운탕 등등. 혼자라면 영 심심할게 뻔하다. 한 그릇 안에도 여러 가지 재료가 함께 뛰놀고, 한 상 위에 다양한 음식과 요리가 가득 차야 한다. 또 대부분의 조합은 입 안에서 동시에 씹히거나 그리 큰 시간차를 가지지 않고 먹힐 때 큰 위력을 발휘한다. 삼겹살 고기를 온전히 다 씹고 넘긴 뒤 채소와 양파절임을 따로 먹는 사람을 감히 상상할 수 없듯이 말이다. 다 함께 버무려서 입 안 가득 다채롭고 풍성한 느낌이 나야 맛이 난다.


국에 부유하는 식(食)에 대한 무한히 다양한 욕망을 단일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의 감각에 비추어보았을 때 최근 변형과 조합에 반영되는 공통된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크고, 많고, 다채로울 때 맛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풍성함'에 대한 지향이 있다고 할까? 한입 와앙하고 넣었을 때 입 안을 가득히 점령하는 충만함에 대한 욕구, 그것이 한국인 다수의 '맛있다'는 감각을 형성하는 기제인 것 같았다. 변형되는 식품은 상당수가 그런 풍성함에 대한 지향과 함께 한다. 글쎄, 고봉밥을 포함한 엄청난 식사량으로 외국인들을 놀라게 했던 조선인의 식성이 우리 유전자에 남아 영향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적인 양의 관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음식을 통해 만들어내고자 하는 감각과 투영되는 욕망이 풍성함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조금 결이 다르다. 크림, 초코, 치즈, 향신료가 가득한 방식으로 변형되는 음식이 유행한다. 복수의 맛이 난립하고 서로 섞이면서 입안을 가득 채우는 조합이 자리 잡는다. 여백 없이 꽉 차는 감각, 끊임없이 어우러지는 채움이 느껴질 때 우리가 욕망한 '맛있음'이 향유된다.


이런 욕구와 감각의 흔적은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앞에서는 음식 간의 조합을 주로 이야기했지만, 요즘 주목받는 맛의 조합 또한 여러 가지 속성이 함께 한다는 특징이 있다. 단짠단짠, 맵단짠, 겉바속촉 등 서로 다른 종류의 미감을 식사를 통해 모두 느낄 수 있을 때 그 식사는 성공적으로 평가받는다. 당연히 아무렇게나 섞인다고 되지는 않는다. 그 맛의 조화가 중요하다. 그런데 조화를 따진다는 건 다채로운 맛이 동시간 또는 연속적으로 음미되는 상황을 전제한다. 불닭볶음면을 다 먹고 나서 물로 입을 헹구고 콘치즈를 먹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얹어서 같이 한입에 넣거나, 면을 한입 먹고서 곧바로 콘치즈를 입에 넣어야 한다. 결국 다수의 미각을 함께 깨워야 완성형의 맛이다. 


세숫대야 냉면, 왕돈가스를 필두로 하여 대왕 카스테라, 점보 라면까지 큰 음식의 바이럴도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전에는 뭣 하러 쓸데없이 크기를 키울까 생각했다. 크기를 키우면 필연적으로 음식의 일부분을 식고, 눅눅하고, 덜 신선한 상태로 먹어야 한다. 정형화된 맛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봤을 때 비효율적이다. 그런데 풍성한 감각에 대한 욕구를 기준으로 하면, 크기가 큰 것이 곧 그 자체로 효율적인 전시가 된다. 입에 가득 넣을 수 있다는 기대감, 보장된 포만감, 그것이 곧 '맛있다'는 감각의 일부로 여겨진다면 이 얼마나 효율적인 전략인가?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외식업계 사람들의 본능적 통찰이 감탄스러워졌다. 무한리필, 뷔페, 그리고 한동안 유행했던 오마카세도 이런 욕망의 연장선에 있음이 분명하다. 끊임없이 접시를 보충하고, 더 다양한 조합으로 음식을 섭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한국에 그런 지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웰빙의 유행 이후 균형 잡힌 식사에 대한 인식이 항상 문화 한쪽에 자리 잡고 있고, 현재도 요리 채널이나 다이어트 채널에서 비교적 원재료에 충실한 소담한 요리를 찾을 수 있다. 애초에 식문화의 트렌드 일원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병존은 계속되리라.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러한 트렌드가 유행하는 영역은 매우 한정적이다. '자기관리 - 다이어트, 미용, 운동, 건강식'이라는 카테고리 외에 식문화 전체에서 지배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류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우선 함께 하는 문화이어야 한다. 가족 또는 친구들과 외식할 때 같이 샐러드를 먹으러 가거나, 정갈한 한정식을 찾는 경우는 비교적 많지 않을 것이다. 함께 고기를 구우며 찌개, 냉면, 볶음밥 등을 더하거나, 아예 뷔페에서 다양한 음식을 섭취하거나, 회와 함께 한 상차림을 해치워야 기분이 난다. 정갈함에 대한 지향을 가지고 있는 요리들이 '외식' 카테고리 상위권으로 진입해야 주된 경향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평양냉면'이라는 독특한 카테고리가 자리 잡은 현상이 흥미롭긴 하다. 다만 이러한 범주의 음식이 십 여개는 되어야 메가트렌드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이닝에 대한 관심 또한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지만 아직 주류 식문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2010년대에 이르러 드라마 ⟨파스타⟩, 예능 ⟨마스터셰프코리아⟩, ⟨냉장고를 부탁해⟩ 등이 흥행을 거두면서 스타 셰프들이 탄생하고 다이닝 문화도 주목받았다. 또 비교적 최근에는 ⟨흑백요리사⟩라는 걸출한 프로그램도 대유행하며 다시금 불을 지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정갈하고 느린 음식에 대한 선호에서 기인한다고 보긴 어렵다. 경연이라는 보증된 컨셉과, 방송사의 연출력, 그리고 셰프들의 낭만과 열정이 섞여서 인정을 받은 것일 따름이다. 프로그램에 등장한 요리가 화제성이 크다고 해서 일상적으로 소비되진 않는다. 물론 일련의 계기로 이러한 소비문화가 점차 바뀌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담백하고 정성 어린 요리에 대한 지향을 논하기에는 시기상조이다. 우리나라에서 파인다이닝 운영이 유독 쉽지 않다는 점을 봐도 그러하다. 옆나라 일본의 미식도시들과 비교하면 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 프랑스 다이닝에 대한 동경이 강하고, 고 이어령 선생님이 말씀하신 "축소지향"의 장인정신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내 소비자들의 욕망이 가닿지 않음이 주요한 요인이리라.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사치의 영역에 속할 뿐, 다이닝 문화에 대한 진지한 열의는 찾기 어렵다.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식문화는 가장 대중적인 형태를 띠기 마련이다. ⟨나 혼자 산다⟩, ⟨편스토랑⟩, ⟨놀면 뭐하니⟩, ⟨미운 우리 새끼⟩ 등등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음식과 요리 과정은 사람들의 욕망을 가장 잘 반영한다.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조리와 취식의 양상은 어떠한가? 재료를 잔뜩 사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리거나, 기발한 조합을 찾아내고 왁자지껄 함께 먹는다. '잘 먹는 사람', 즉 엄청 많이 먹거나, 복스럽게 먹거나, 맛있는 조합을 찾아 먹는 사람이 프로그램의 적임자로 여겨지고 많이 섭외된다. 출연자들은 소문난 식당에 방문하거나 숨겨진 맛집을 영업비밀마냥 조심스레 풀어놓는다. 다이어터가 아닌 사람이 소수의 재료를 가지고 소박한 밥상을 차리거나 천천히 음미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고 간혹 보이더라도 흥미를 끌지 못한다. 일부는 '소식좌'들이 주목받았음을 반례로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키워드 자체보다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에 주목하면 여기서도 같은 대중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소식좌가 이목을 끈 것은 사람들이 그런 식습관을 지향하기 때문이 아니다. 워낙 풍성한 한 입과 가득 찬 식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소식좌'의 모습이 너무 신기하게 느껴지고 그것이 좋은 예능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소식좌의 정말로 닮고 싶은 부분은 그들의 식습관이 아니라 적은 체중이다.


사람들이 투영하는 욕망에 따라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이 또 역으로 사람들의 욕망을 형성해 나가기도 했다. 풍성함을 선망하는 식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미디어와 광고의 영향력은 듣기만 해도 진부하게 느껴질 만큼 실증된 주제이다. 그중에서도 언제든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 있다. 프로그램에서 나온 재료는 인기 검색어에 오르며 유명인이 방문한 식당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맛있어 보이기만 하면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 찾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정말 여행을 다닐 때마다 느낀다. 맛집뿐 아니라 먹는 방식까지 자연히 전파됐으리라. 정우성과 이정재가 종지부를 찍기 전까지는 면치기가 정석적인 방식인 마냥 보였듯이 말이다. 다른 누군가가 대안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지금의 '충만한' 식문화가 아주 자연스럽게 미디어를 통해 강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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