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지는 시간, 지하철 2호선의 공기는 확실히 아침보다 가볍다. 굳은 표정으로 지친 몸을 끌고 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다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서 쉴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작은 위로가 되어준다. 때때로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는 학생들이 탈 때면, 활력을 넘어 그 시절에의 향수와 작은 부러움마저 느낄 수 있다. 직장인과 학생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나는 민망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핸드폰을 꺼낸다. 여느 때처럼 위키와 매거진들을 넘겨 활자를 욱여넣고 있는데, 페이지를 넘길 때 한구석에 성인웹툰 광고가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노골적인 몸선과 야시꾸리하게 해석되는 중의적 멘트가 참 천편일률이다. 공공장소에 도저히 어울릴법하지 않은 광고, 누가 훔쳐보기라도 하면 괜한 오해를 살지도 몰라 손가락을 휙휙 퉁긴다. 방문기록과 알고리즘을 주기적으로 리셋하는데도 이 정도로 광고가 노출된다면, 실수로라도 저 광고를 클릭하는 순간 구글 애드센스가 날 가만두지 않겠어.
한 번은 성경을 찾아볼 때였다. 영번역을 확인하기 위해 본문을 검색하는데, 또 야시꾸리한 광고가 뜨는 것이 아닌가? 성경을 보면서도 이런 광고에 노출되어야 된다는 사실에 화가 난 나는 급하게 닫기 버튼을 찾다가 이 나이에 벌써 돋보기안경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 의심했다. 거의 보이지도 않더라. 더 알아보기 버튼과 아주 친밀하게 붙어있는 x자를 어떻게든 클릭하려다가 멈칫,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일단 광고를 클릭한다. 우선 들어간 뒤에 차단이든 싫어요를 누르든 반드시 응징하리라! 그러나 채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순식간에 수많은 광고 팝업창에 포위되고 말았다.
절치부심하여 광고 설정법을 검색하기 시작하지만, 사용설명서급으로 화면을 꽉 채우는 활자에 벌써부터 피로감을 느낀다. 구글 고객센터를 대상으로 요약법 강의라도 가르쳐야 할 판이지만, 삐딱한 나는 사실 그들이 이 불편함을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데 이른다. 영어를 그대로 번역한 딱딱한 말투와 타 서비스보다 훨씬 난잡한 UX를 참아가며 "개인 맞춤 광고 사용 설정" 버튼까지 들어가지만 이내 더 불쾌한 생각이 든다. 광고를 맞춤 설정하는 내 취향조차 일종의 데이터가 아니던가. 별로 쓸모도 없는 데이터, 이미 중국과 북한 해커들에게 털리고도 남았으리라는 생각도 들지만 기분이 나쁜 건 여전하다. 나는 그저 성적인 의도로 몸선을 드러내는 광고를 보고 싶지 않을 뿐인데 이런 수고와 권리의 이양이 필요하다니! 더 최악은 광고 알고리즘이 결과적으로 나를 '광고를 클릭한 사람 1'로 생각할 뿐이라는 것이다. 맞춤설정까지 포기해 버렸으니, 이제 나를 겨냥한 광고에는 성인웹툰이 더 노출되겠지.
한바탕 전투에서 보기 좋게 패배한 뒤 다국적 기업과 광고 생태계를 넘어 미디어 전반의 섹슈얼리티에까지 생각을 이어나간다. 뭐 나도 성인인데, 성인 광고가 뭐 그리 문제인가라고 되묻자 초점은 성인 콘텐츠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이내 깨닫는다. 성인이 된 지도 한참인 내가 적절한 때에 성인물을 즐기는 게 무엇이 그리 잘못이란 말인가. 성적인 콘텐츠를 터부시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선택권을 욕망할 뿐이다. 내가 바라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섹슈얼리티를 향유하기, 그게 내가 욕망하는 자유이다.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잘못된 대상에게 성적 욕망을 투영하지 않는다면 그처럼 선명한 즐거움이 또 없으니깐. 자유 없이 무분별한 성적 자극에 노출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렇게 생각하니 의문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성인물 사이트와 성인 게임은 불법화하고 금지하는 규제국가에서 여러 종류의 성인 광고는 어떻게 무분별하게 등장할까? 소위 정론지를 포함한 언론사 사이트에 도배되어 있는 선정적인 광고 지면은 왜 여전히 건재한지도 물음을 떨쳐낼 수 없다. 또 조금만 개방된 성교육에도 발작하는 학부모들은 이렇게 많은데, 소셜 미디어를 통한 성적 유인과 학대는 얼마나 흔하고 처벌은 또 어찌 그리 관대한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모순들에 대해 생각하자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불만이 너무 커져 나를 잠식하기 전에 모든 생각을 멈추고자 침대로 몸을 던졌다.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켜놓기만큼 혼을 빼는데 좋은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활동(活動)이래 봤자 눈동자와 손가락의 움직임이 전부지만 빠른 당 충전처럼 간편한 미디어 도파민임은 확실하다. 그렇게 한 번 잡은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어놓기는 쉽지 않다. 낄낄거리며 화면을 넘기다 보면 한두 시간은 훌쩍이다.
그런데 한참 숏폼을 넘기다 보면, 이젠 가상이 아닌 아닌 현실의 몸선들을 만나게 된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라인을 뽐내는 숏폼 챌린지, 선을 넘을 듯 말듯한 멘트와 노출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끄는 개인방송, 몸선과 기타 주제의 아슬아슬한 혼합으로 되어 있는 수많은 종류의 게시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채널 추천 안 함', '관심 없음', '싫어요' 등등 여러 가지 방편으로 맞춤 알고리즘을 만들어놓은 계정에서는 그나마 덜하지만, 개설한 지 얼마 안 된 계정에는 그런 조정이 들어가 있지 않다. 혈기왕성한 젊은 남성 유저로 타겟팅 되는 순간, 몇 번의 클릭만으로 피드가 바뀌어가는 걸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런 거 안 뜨던데?"라고 말할 많은 건전한 삶의 향유자는 한 번 동네피시방에 가서 몇 번의 검색을 시도해 보길 권한다. 알고리즘을 정확히 파악할 순 없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알게 되리라. 그리 어렵지 않게 많은 몸선을 접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몸선이 드러난다고 해서 모두 섹스어필의 의도를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필라테스, 보디빌딩, 룩북, 춤 등 다양한 주제에서 몸선이 드러나지만 그 노출의 정도와 목적에 있어서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일례로 김종국, 김계란 유튜브 채널의 운동 영상을 보면서 섹슈얼한 의도를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근육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 가동범위를 어떻게 늘릴 수 있는지가 관심사일 뿐이다. 피트니스나 운동 계열 영상이 신체공학적으로 아름다운 몸선을 만들고 보이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면 시청자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나 역으로 많은 인플루언서들이 운동 콘텐츠와 함께 섹슈얼리티를 중첩해서 사용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신이 운동에 들이는 시간과 공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지만, 잘 가꿔진 몸매를 자랑하려는 사람도 있다.
룩북의 경우 운동보다는 성적으로 소비되는 콘텐츠의 비중이 더 높다. 사실 룩북 콘텐츠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인공지능 관련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연관 검색어에 AI 룩북을 발견하곤 실상을 알게 되었다. 룩북이 많은 사람에게서 섹스어필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경향을 이어받아 생성 인공지능 창작물 또한 속속들이 생겨나는 추세라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영상 플랫폼을 분석하는 도구를 통해 확인해 보면 노출을 중심으로 조회수를 끌어내는 전략의 양면성을 알 수 있다. 조회수나 상호작용 면에서 차트 상위를 차지하지만 정작 해당 플랫폼 인기 영상에는 오르지 못하니 말이다. 노출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조회수와 알고리즘의 축복을 모두 받기 위해서는 라이프스타일, 패션 카테고리에서 분명한 개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춤은 태생적으로 섹슈얼리티를 자유자재로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세련된 방식이라고 느껴지는 방향은 숙련자의 절묘한 춤 속에서 자연스럽게 섹슈얼리티가 드러나는 경우이다. 스우파의 굉장한 히트 이후 전업 댄서들의 아름다운 춤선과 자유로움을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돼서 지속 가능성 있는 하나의 콘텐츠 범주가 형성됐다고 생각한다. 이와 달리 춤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춤을 통해 드러나는 외모나 끼로 이목을 끄는 방식도 항상 트렌드에 함께 한다. 이전에는 개인방송 BJ와 틱톡커들이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치어리더와 연예인들도 쉽게 참여할 정도로 메이저한 흐름이 되었다.
이처럼 몸선이 향유되는 행태가 콘텐츠의 유형별로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같은 유형 안에서도 넓은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콘텐츠 소비자로서 다양성은 반길만한 일이다. 때때로 달라지는 취향을 만족시켜 줄 다채로운 영상과 이미지들의 존재를 꺼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이런 개념화 자체가 불편할 수 있다. 운동 전문가, 패션 인플루언서, 댄서 등과 노출을 핵심 콘텐츠로 사용하는 크리에이터들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전문가나 유명인의 성역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도리어 섹슈얼리티라는 테마가 지나치게 매혹적이어서 정보 전달이나 개성 표현이라는 영상의 취지가 무색해지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몸선의 노출이라는 형태에만 주목하면 폭력적인 일반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도 하다. 전업 댄서의 춤선에서 드러나는 섹슈얼리티를 승화된 예술이 아니라 단순한 외설로 이해하는 것은 그런 단면적인 사고방식을 전제한다. 범주보다 개체가 우선해서 존재하기에, 늘 콘텐츠 생산자의 의도가 작품에 대한 일반적 관념보다 중시되어야 한다.
한편 섹슈얼리티를 드러냄 자체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비슷한 유형의 다른 영상들에 끼치는 영향에 상관없이 특정 영상에 드러나는 몸선 자체에 부정적인 시선을 갖는 것이다. 개인의 기호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수 없지만 그런 기호가 나타나는 원인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섹슈얼리티 자체에 과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누군가 자신의 신체를 드러냄으로써 성적인 매력을 뽐내는 일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몸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남의 몸 또한 그런 방식으로 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긴 한다. 다만 누군가에게는 그런 노출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다. 내 자유를 침해하지만 않는다면 내게 그것을 막을 권리 또한 없다.
그러나 유교 탈레반과는 거리가 먼 나에게도 틀림없이 섹슈얼리티가 드러나는 영상들이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불편함을 넘어서 부자유함과 힘겨움의 영역에 들어설 때도 분명 있다는 것이다. 가끔은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에 섹슈얼한 몸선의 홍수가 들이닥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묘하다. 운동 영상들, 예술 공연, 음악은 도처에 널려 있어도 파도 같이 느껴지지 않는데, 섹슈얼리티를 메인으로 하는 영상들은 급히 밀려드는 물살처럼 느껴진다. 그 많은 몸선들이 어느 순간 거슬리기 시작한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생물학적 '본능'을 거스르는 것일까?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남성임이 분명한데도 그런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이 신기했다. 실례가 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 많은 몸선들에게서 성인웹툰 광고를 볼 때의 그 데자뷰를 느낀다. 성인물을 정상적으로 즐길 줄 아는 사람임에도 그 선정적 광고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듯이, 몸선들을 사랑함에도 어떤 때는 이미 가득 찬 속에 욱여넣는 마지막 한 입의 그 디저트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발상을 전환해서 나에게 바로 그 생물학적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 지나침을 느낀다고 생각해 보았다. 만약 성징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어린아이를 데려다 놓는다면, 그 몸선의 움직임이 섹슈얼리티의 난립이 아니라 그저 동작들의 연속으로 보이리라. 몸선의 홍수가 불편해지려면 그 이전에 욕망이 있어야 한다. 몸선에 섹슈얼리티에의 욕망을 자극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 속성에 내가 욕망을 투영하는 방식이 익숙할 때 무언가 불편해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에 그 욕망이 불편해지는 것일까?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망이 불편해지는 지점, 바로 거기. 과대하게 밀려드는 파도 속에서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되는 그 순간이 궁금해졌다.
"보고 싶지 않다. 너의 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