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아니 11시였을까?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심야 교습 제한이 생겨 외고 입시 학원이 당국의 눈치를 보던 때가 기억난다. 몰래 도박장을 개설하는 것마냥 조용히 창문을 내려 새어나가는 빛을 감추고, 자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을 복도에 줄 세워 재시험을 보게 하였다. 강의실에 앉아 있다가 경찰이 들이닥치면 변명거리가 없어서 큰일 난다나 뭐라나. 중학교 교과서 수준으로는 턱도 없는 토플 단어를 달달 외우고, 수능 국어 지문을 미리 풀어서 감을 익히는 무시무시한 커리큘럼을 가진 곳이었다. 교육 특구 목동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구석의 '가짜 목동'에서 유학(?) 온 나는 과연 외고 준비란 게 나 같은 촌뜨기도 할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수재들과 내가 겨뤄도 되는 것인지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새벽 2시, 아니 3시였나? 입시철이 가까워오자 학원은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그때까지 연장해 주었고, 그 늦은 시간에도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들로 인해 학원 앞은 주차난에 시달렸다. 단지에 사는 게 분명한 그들보다 더 멀리서 온 우리 촌뜨기들이었지만 부모의 픽업은 차마 바라지 못했다. 4명을 모아 택시를 타고 중간지점에 내려 헤어지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었다. 하루 온종일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는 성취감, 걸어가는 길에 볼을 스치던 찬 공기, 난시가 심한 내 눈에 유독 더 퍼져 보이는 가로등 불빛, 전우처럼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의 애정 어린 작별 인사, 그것이 노곤함을 이겨내게 하는 위로가 돼주었다.
위로. 그래, 그것은 학생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보정 렌즈이다. 그러나 지금 유체이탈을 하듯이 당시의 현실을 돌아보았을 때 나의 시간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큰 욕망은 그 위로를 향하지 않았다. 잠을 줄여가며 머리를 들게 하고, 두 눈을 부릅떠서 문제 하나라도 더 보게 했던 원동력은 '잘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였다. "사람은 누구나 잘 되고 싶어 한다. '난 망해야지. 내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려버려야지'라고 진심으로 결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고등학교 은사님의 말이 여전히 귀에 맴돈다. 유독 그 말이 남은 이유는 당시 내 마음과 공진했기 때문이리라. 잘 되고 싶다는 마음,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베놈처럼 자아에 살아 숨 쉬던 그 느낌을 정확히 기억한다.
어떻게 하고 있어야 잘 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 평가지표는 물론 성적이었다. 좋은 성적을 얻고 있으면 잘하는 것이고, 나쁜 성적을 받으면 못하는 것이었다. 나의 성공이 시험 결과와 동일선상에 위치했다. 그래도 당시에는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고 내 성적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믿었다. 내 템포에 맞춰서 나와 경쟁하자. 그런 건전한 마음가짐을 먹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럴 수가 없는 구조라고 생각된다. 나의 욕망이 온전히 개인적 진보에 집중될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었다. 사실상 모든 시험은 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언뜻 절대평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시험들도 있었지만, 결국 입시의 영역에서는 누가 누구보다 우수한 성적을 받는가가 중요하지 않던가? 특정 시험 과목에서 당장 반 아이들과 경쟁하지 않을 순 있어도 결국 그 과목들이 종합된 성적에서는 우열이 나뉘었고 이를 지표 삼아 상급 학교가 결정됐다. 내가 시험을 잘 봤다는 사실은 전교에서, 나아가 전국에서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을 제칠 수 있는 지를 의미했다. 학원에서는 그것이 더 명확히 느껴지기 마련이다. 매 수업마다 단어시험, 매 달마다 전체 평가로 나의 등수가 확인됐고 그것은 곧 상대적 위치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학원의 모든 아이들 머리 위에 등수가 새겨지는 것처럼 보였다.
오해하지 말기를. 나는 ⟨Sky 캐슬⟩에 나오는 주연들처럼 입시에 광기 어린 집착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삶의 모든 가치를 학벌에만 두고 극적으로 질주하려는 패기조차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평범한 학생 1일뿐이었는데 친구들 머리에 성적표가 붙여진 것처럼 보였다는 게 신기한 포인트인 것이다. 외모나 학교를 기억하듯이 성적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기록되는 정보였다. 쟤는 착하고 좋은 애, 근데 공부는 나보다 못함. 저 친구는 잘생겼는데 공부도 잘함. 쟤는 나보다 잘했었는데 지금은 많이 성적이 떨어져 있는 애. 그런 생각은 사적인 감정으로 만들어지는 가치 부여에서 생기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객관적 사실'이었을 뿐이니깐. 물론 처음에는 그랬다. 그저 받은 성적에 따라 자연스럽게 달리는 하나의 꼬리표였지만 그 상대적 위치가 점차 자연스럽게 우리를 규정하는 하나의 가치 지표가 되곤 했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친구를 비웃고 있는 속내를 느꼈다. 그 죄책감을 기억한다. 정말이지 죽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였는데 생각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으로만 따지면 나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매 시험마다 거의 모든 과목에서 내가 더 높은 점수를 받자, 점차 그 친구와 나 사이의 현격한 차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사실에 동요되지 않고 친구를 그저 하나의 인격으로만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 친구는 정말로 착한 심성을 지닌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을 볼 때마다 성적차는 계속 벌어졌고, 악독한 학교는 성적에 따라 학습석 자리를 배치했다. 그 친구는 점점 날 부러워하게 됐고, 나는 그것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 친구처럼 머리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 귀에 속삭여진 은밀한 한 마디가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친구가 나를 부러워하는 게, 나처럼 빠르게 내용을 습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선생님께 상담을 받는 게, 사실은 그리 기분 나쁜 일이 아니라고 오히려 즐거울 수 있다고 설득시키던 그 길티플레저를 기억한다. 그 감정을 느낀 뒤 나는 그 친구와 더 이상 진정한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서로를 친절히 대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인격으로 교류하는 순수한 관계가 아니었다.
당연히 내가 항상 우월한 입장에 있던 것은 아니다. 벽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고 열등감을 느끼는 쪽에 속하는 것이 사실 더 빈번한 일이었다. 그나마 자신 있던 수학 과목이 급작스럽게 입시에서 제외되자 영어에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와 더불어 성적의 사다리가 나를 더욱 짓누르기 시작했다. 비슷하지만 조금 더 잘했던 친구들을 보면서는 조바심을 내고,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내심 부러워했다. 얼마나 인상 깊었으면 지금도 이름이 기억나는 전설들도 있다. 유명 정치인의 자녀였는데 속독법까지 능통했는지 중학생이 고등학교 언어 지문을 다 풀고서 30분이 넘게 남아 엎드려 잤다는 이야기, 학교에서는 허구한 날 자고 놀 건 다 놀지만 전국구 순위를 다퉈서 온갖 학원에서 돈을 주고 합격명단에 포함시켰다는 선배의 일화 등.
유전자에 각인된 능력이든, 어렸을 때부터 갖춰진 환경의 영향이든 정확한 요인은 몰랐다. 중요한 것은 노력으로 더 올라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학습 학원에 다닌 적이 없었고 목동 기준으로는 늦게 공부를 시작한 편이기 때문에 빈틈이 너무 많았다. 동네학원 최하위반에서부터 시작해서 입시전문학원 외고반까지 수 십 개 계단을 상승하는 경험을 했지만, 하필 외고 입시에서 제일 중요한 영어의 갭은 단기간에 줄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토플 수준의 단어를 수십 개 수백 개씩 외우고 각종 기출문제를 찾아 풀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어려서부터 영어에 노출된 친구들에 비해 너무도 기본기가 부족하였다. 애초에 너무 뛰어난 친구들은 경쟁상대로 삼지도 못했다. 그저 놀라워하고 부러워했을 뿐이다.
경쟁의 심리는 따라잡고 잡힐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들 사이에서 생긴다. 동경과 질투의 경계는 상대방과 제로섬의 대결 구도에 같이 처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나와 같은 반의 학원 아이들과 공부를 좀 하기에 자연스럽게 뭉친 학교 친구들이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극적으로 치고 박는다거나 대놓고 왕따를 시킨다거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사회화되지 않은 하수의 공격법이다. 그보다는 자기 입지도 지키면서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릴 줄도 아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자연스럽게 퍼졌다. 정말로 친한 친구들끼리는 서로의 성적을 비꼬는 행위가 금기시되었으나, 조금 거리가 있는 관계에서는 자존심을 공격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시험에서 뒤처질 때마다 은근히 깔보는 상대방의 언행이 보이기 시작했고, 점차 그것에 민감해졌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착하다는 편견이 그때 깨졌다. 개중에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나 세상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친구들이 있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간사한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공부랑은 거리가 먼 양아치 친구들의 직설적인 무례함과는 다른 결의 영악함이었다. 성적의 분화 이상으로 인성의 양극화가 심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아이들한테 무슨 큰 잘못이 있을까? 그들도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왔을 뿐이다. 나도 똑같이 친구를 비웃는 마음을 품지 않았던가? 존재의 가치가 능력으로 매겨지는 작은 사회, 그 속에서 조소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분투였으리라. 상대방의 학업 역량을 평가하고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다른 한 편으로 그 잣대가 자신에게도 향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성적이 떨어지면 언제든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질주해야만 했다. 아직 갈 길도 먼데 쉬엄쉬엄 걷는 사람을 보면 한심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연지사일 수도. 그들에게는 남과 자신 모두가 빨리 가야만 하는 길이 보였던 것이다.
성적의 사다리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도 옭아맨다는 사실은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의 행동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남에게까지 그 잣대를 들이밀지 않았지만 본인의 삶을 개척해나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무언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잦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가시적 성과를 이뤄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항상 함께 하니, 날 위에 서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소한 일탈들은 계속 됐고 그러면서도 불안에 찬 모습이 바뀌지 않았다. 공부와 영 담을 쌓고 사는 친구들의 사춘기와는 분명 구분되는 모습이었다.
물론 억압적인 분위기를 싫어하는 나의 과장된 기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성적과 괴리되는 병리적인 모습은 학생들 눈에는 꽤 분명한 사실이었다. 몇몇 극단적인 케이스는 충격이 커서 아직도 내 뇌리에 박혀있을 정도이다. 학원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씀을 꼬박꼬박 지키는 순종적인 A가 있었다. 빠른 영어 진도를 버거워하는 반아이들을 배려하기 위해 본인은 다 아는 문제를 선생님께 다시 질문해 줄 정도로 세심한 아이였다. 어느 날은 A를 포함한 무리와 삼삼오오 모여 학원 앞 빵집에 저녁을 사러 갔다. 그리 큰 규모도 아닌 빵집에 원생 몇 백 명이 몰리니 그야말로 문전성시가 따로 없었다. 초딩 입맛을 저격한 찰떡피자빵을 고르고선 카운터로 향하는 길인데, 입구 방향 빵 진열대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손은 눈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A였다. 빵 몇 봉지를 순식간에 점퍼 주머니에 욱여넣고 재빠르게 빵집을 벗어난 A는 다른 친구들에게 승리의 윙크를 선 보이기까지 했다. 훔치는 일에 얼마나 익숙한지 곧바로 cctv의 사각지대를 찾아 편의점 물품까지 쓱싹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은 그 친구가 왜 도둑질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벽을 애교 수준으로 만드는 인간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영재반에 속할 정도로 명석한 B가 있었는데, 줄곧 잘 어울려 다녔지만 서로 다른 중학교에 배정돼서 이후로는 연락이 끊겼었다. 어느 날 학원에서 알게 된 친구를 통해 우연히 소식을 들었는데 학원 친구 말로는 B가 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좋은 기억만 공유했던 아이였기에 의문이 들어 무엇이 이상한지 물어보자, 지하철 계단 등에서 몰카를 찍어와서는 자신에게 자랑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급작스럽게 들은 소식 때문에 얼굴에 올라오는 혐오감을 미처 감추지 못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B를 다시 찾아볼 생각조차 말끔히 없어져버렸다. 마지막 계도의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닐까 안타깝긴 하지만, 학생 때의 작은 심정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긴 하다.
이 일화처럼 범죄의 수준에 해당되는 비행이 일반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이런 행동을 모두 입시 스트레스와 연결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공부하는 성실한 학생'의 이미지와는 연결시킬 수 없는 일탈은 일상적이었고 대부분 성적과 입시에 집착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은 곱씹어볼 만하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어떤 삶을 요청하고 있는지, 또 그들은 그 안에서 망가지거나 신음하고 있는 건 아닐지 되돌아보는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
학창 시절이 열심히 살았을지언정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과거로 남은 데에는 그런 날카로운 소용돌이가 원인이 됐다. 가장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느꼈던 감각이기에 인에 박힌 듯 새록새록하다. 인디언 속담에 등장하는 양심의 삼각형처럼 그런 감각 또한 익숙해짐에 따라 무뎌지기 마련이다. 고등학교와 재수학원에서 느꼈던 더 강렬한 욕망들은 그런 무뎌짐으로 인해 그에 비해선 덜 선명하게 남았다. 어쩌면 내가 그런 구조 속에서 사는 것에 점차 지쳐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