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에서 성공으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연장선만이 존재하고, 거기 어디엔가 위치해 있다는 감각이 중학교부터 최근까지 나를 단 한 번도 놓아준 적이 없다.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성공으로의 전진이라는 생각, 그것이 입시, 전문직 자격증, 창업과 엑시트, 대기업 어느 분야이든 상관없이 일단 달리고 봐야 한다는 그 감각과 욕망이 아직도 나를 괴롭게 한다. 설사 때때로 실패를 긍정하는 관용을 베풀었을지라도, 그것은 그 연장선에서 아예 하차할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성공과 실패라는 두 개의 틀로만 분할된 삶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으면 뒤쳐져서 죽는다는 두려움은 반복해서 나를 삼켰다.
'그냥 산다'는 사람들을 좀처럼 보지 못했다. 성공과 실패라는 폭력적인 개념 없이 삶을 삶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저 존재해내가기만 하는 인생들을 마주치지 못했다. 다들 불안에 떨고 소리를 치고 이를 간다. 어릴 때는 학교가, 좀 더 커서는 직업과 자격증이, 이제는 부동산과 투자가 우리의 갈망하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그룹의 친구를 만나도 다 돈 얘기, 집 얘기를 멈출 수 없다. 오르는 집 값에 분노하고 각박해진 삶에 대해 불평한다. 취업이 얼마나 힘든지, 취업을 해서도 남의 돈 빼먹기가 어찌 이렇게 힘든 건지, 회사는 또 얼마나 개떡 같은지, 부동산 정책은 왜 이 상황인지. 우리 뒤에는 좋은 고등학교, 일류 대학에 가야 된다는 그 압박처럼 또 다른 돌덩이가 구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뛰어야만 했다. 저스트 두 잇! 잠시 가만히 앉아 생각이라도 할려면 다들 나를 일으켜야 된다는 사명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아니, 사실 그럴 리가 없다. 그냥 사는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은 게 아니라 알아보지 못한 것뿐. 내 눈에 씐 '단 하나의 가도'를 온전히 벗겨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도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그저 도태된 자들의 변명으로만 생각했을까? '감성팔이 위로책이나 쓰는 사람', '하다 하다 안 풀려서 별난 일을 하며 자기를 포장하는 사람', '패배하고 탈락한 사람들'. 성적꼬리표로 친구를 판단했던 그 비열한 냉소가 어른이 된 이후의 나에게 조금 변형된 형태로만 남아 있는 것 아닌지, 그래서 하루하루 오롯이 존재해 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볼 여유도 그들을 존경할 수 있는 지식도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워졌다. 직립보행을 하며 사람의 눈은 앞과 위 보기를 기본값으로 설정한다. 꼿꼿이 서서 아래쪽을 보려면 눈을 깔아내려야 한다. 고개를 빳빳하게 든 내게 아래쪽이 있는 그대로 보일 일은 없었다. 늘 나아갈 길과 더 높은 자리에 시선이 머무를 뿐이었다.
그 교만이 나를 심판으로 이끌었다. 질주하고 질투하고 비웃음으로 점철된 삶의 원동력이 이번에도 나를 그대로 짓누르면서 말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라는 말이 바뀌어 "질주로 흥한 자 질주로 망하리라"라는 격언이 나에게 생겼다. 반복된 학업과 비교의식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생각대로만은 절대 풀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내게 도울 회복탄력성의 근력은 마비시켰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이 내 삶을 잠식하기 시작하자 내 성공의 공식은 깨지기 시작했다. 일단 달리다 보면 원하던 자리에 도달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엄청 큰 착각이었다. 포르투나 여신의 변덕은 생각이상으로 짓궂었기 때문이다. 비르투를 주창했던 마키아밸리조차 자기 인생은 생각처럼 풀지 못했으니 나 같은 범인은 더 감당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다행일까? 지금의 나는 아직 그 구태의연한 불행의 회로를 끊어내지는 못했을지언정, 비로소 겸손한 시선으로 반성할 수는 기회는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다른 한편에서 내게 말하는 속삭임은 멈추지 않는다. "다시 설국열차 안으로 돌아가, 밖에 있으면 얼어 죽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이기적 유전자'가 생존하기 위해 나를 닦달하는 걸까?? 헬조선의 극한 환경에서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한다고 소리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극단적 진화론의 거품을 걷어내면 이것도 과장된 사고가 분명하다. '적응'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종이 '적자'인 것이 아니던가? 이번에는 공상을 사회적 구성물로 옮겨가 본다. 성리학부터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는 '학(學)'과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대한 집념일까? 그것도 아니면 최후발로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직접 검증한 성공 공식을 이식했기 때문일까? 입시와 학벌, 스펙과 경쟁이라는 치열한 다툼이 만들어낸 게임일 수도 있다. 한 가지 인식할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을 통해서든 내가 그렇게 훈련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시작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던 것 같다. 그냥 성공하고 싶으니깐, 잘되고 싶으니깐 그래서 열심히 하는 거지 뭐 다른 이유가 있었겠나. 이런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것이 또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짓누르는 기준으로 진화하는 것을 보면 그 사이 어디엔가 분명히 연결 고리가 있다고 감각할 수 있다. 심지어 이제는 학생 때처럼 대놓고 채찍질하는 선생님도 없지 않나? 도대체 어떤 경로가 우리를 이토록 불행으로 이끄는지 궁금해졌다. 자살률과 출산율이 보여주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한국사회의 그늘로 이어진 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