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신앙
전 글에 이어서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아렌트가 주목한 '시작하는(initiate)' 능력은 의미론상으로는 '다시 시작하다'와 중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신학적 표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국한될 뿐이다. 그냥 '시작하다'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다'에 걸맞은 예표가 필요하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무엇인가를 시작했지만 이내 포기했던 경험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쌓아 올린 것이 모두 송두리째 무너지고, 의미가 무가치함이 되는 순간, 무엇에 의존해야 할까? 하나님은 어디 계신지, 예수님이 내 삶에 함께 하고는 있는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할 때, 그런 차가운 침묵 속에서도 나를 일으켜 세울 근거가 있어야 한다. '다시 시작하는 믿음'이 시작하는 그곳. 바로 십자가와 돌무덤 앞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뒤,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의 모든 절망의 상황을 포함한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 온 세상 사람들의 멸시, 가난하고 병들고 볼품없는 육체. 그러나 그 비통의 잔이 곧 영광의 면류관으로 바뀐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면서 모든 죄를 씻어내지 않으셨던가. 원수의 머리를 밟고, 하나님 우편에 서셨다. 죽음이 득세한 듯 보이는 그 자리에서 부활이 시작되었다.
이 땅에서 탄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죽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우리도 어떤 일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몇 번을 멈췄어도 좋다.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해도 괜찮다. 십자가 앞에서 나를 내려놓고, 돌무덤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면 된다. 어떻게 실현할까?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성찬을 통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와 살을 입는 것이다. 부활 신앙이 오늘 우리를 다시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