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를 본 숫자보다 책을 읽은 숫자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그러다 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이름도 모르고 영화에 대한 추억도 별로 없다.
그래도 1995년쯤 개봉한 City of Joy 영화는 나의 인생 영화라서 많은 부분이 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인도를 배경으로 한 이영화는 시골에서 온 가족을 데리고 켈커타로 온 하사리라는 가장과 맥스로우 라는 의사가 나온다. 하사리가 켈커타에 도착하자마자 첫날 사기를 당해서 온 가족의 생명 같은 돈을 날리고 망연자실하는 대목이 나온다. 정말 오래된 영화이고 행복했던 영화지만 문득 오래 전의 이영화를 기억의 설합에서 소환한 이유는 그때 주인공의 심정이 지금의 내 심정과 비슷한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슬프고 속상한 일일 거다. 2020년 제주에 대한 여행 에세이를 한 권 쓰기로 마음먹고 지난 설 연휴에 제주 수선화를 보러 다녀왔었다.
혼자여야 글에 집중할 수 있고 즐김이 깊어질 수 있기에 3박 4일을 오롯이 느끼고 서울로 와서 휴일 하루를 글쓰기에 집중했다. 오랫동안 ‘브런치’에 계정만 만들어 놓고 미루다 이번에는 브런치에 직접 글을 썼다. 상당히 긴 글을 쓰고 마지막 클릭을 잘못해서 내가 하루 종일 쓴 글을 날려 버렸다. 상실감이 컸다. 마치 시골에서 켈커타로 처음 오자마자 사기를 당하듯이 60 중반의 아줌마가 겁 없이 브런치에 직접 글을 쓴 것은 시골에서 온 가족을 데리고 꿈과 희망을 빵빵하게 부풀려서 온 그와 입장이 비슷하다고 생각이 된다.
특히 수선화 향기는 시를 쓰게 만들 만큼 푹 빠져서 쓴 글인데 글을 마치고 마지막 실수로 누른 게 되돌릴 수 없다는 건 글로는 설명이 안된다. 바보 같은 짓을 한 것도 문제지만 브런치도 나 같은 실수를 보호해줄 장치를 보완해주면 좋겠다. 그때의 난감함과 상실감 때문에 날아간 글을 다시 재현할 수 없는 건 나만 그런 건지 모르지만 똑같은 글이 써지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수선화 축제가 끝나는 마지막 휴일 아침 비행기로 당일 여행을 떠났다.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의 감성이 다시 복원되길 바라는 심정으로 갔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는 봄 햇살이 좋아서 오늘은 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위로했다 특히 이번엔 차를 랜트하지 않고 제주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당일치기 여행에는 차를 랜트하고 반납하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나는 대중교통 쪽을 택했다. 낯선 도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도전을 할 가치가 있기도 하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불이 낳게 택시를 타고 수선화를 보러 가는 것보다는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한발 한발 아껴서 도착하고 싶었다. 신부가 버진로드를 한 발 한 발 걸어가듯이 감정을 되살리며
그런 발걸음으로 도착하고 싶었다. 제주공항에서 4번 게이트로 나가면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102번 버스를 타고 한림 환승 정류장에서 202번 버스를 기다리면서 편의점에서 간식으로 달걀을 두 개 사고 서니칩 스낵도 샀다. 그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주변 식당에서 뭔가를 먹다 보면 버스를 놓칠까 봐 구멍가게에서 검은 비닐에 담아준 간식을 덜렁거리면서 30여 분 후 도착한 지선버스 202번을 타고 한림공원에 도착했다. 기대했던 햇살은 구름에 가려져서 아쉬웠지만 대신 수선화의 진한 향에 취할 수 있으니까 더 좋은 점도 있다.
제주도가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개편을 했다는 이야길 듣고 체험을 해보기 위한 이유도 한켠에는 있었다.
근사한 현대식 버스였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 인공 방향제 향이 너무 강했다. 나처럼 후각이 예민한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된다
버스는 서울버스보다 더 좋았다. 그러나 제주 버스가 나에겐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방향제 향기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흔한 인공 방향제를 제주까지 와서 맞는다는 건 정말 누구라도 싫을 거다. 차라리 비릿한 바다향이 더 좋았을 듯하다. 차라리 그냥 냄새를 잡아주는 것이 더 좋았을 듯 생각도 해보았다.
차를 랜트해서 이동을 하면 제주의 로컬을 즐기는 게 아니고 그냥 목적지로 직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제주 버스를 타면 이곳저곳을 경유하면서 제주의 속살을 보게 된다. 한림리에서 내려서 30분 정도 기다렸다 한림 파크 가는 지선버스를 탔다. 여기는 인공 방향제가 없어서 훨씬 더 좋았다. 제주공항에서 입장료 할인이 되는 엡을 다운로드하여서 기대를 했는데 겨우 600원만 할인이 되어서 실망을 했다.
지난 설 명절 연휴를 이용해서 오직 제주 수선화를 보기 위해 오후에 한번 오전에 한 번을 다녀갔다.
서울에서 하루 동안 꼬박 쓴 글을 잠깐의 실수로 날려버리고 마음의 상처가 커서 도저히 글이 써지지 않아서
그때의 기분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어서 수선화 축제가 끝나는 마지막 날 한 번 더 왔다. 제주시내는 일기예보와 다르게 멋진 하늘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하더니 한림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구름층이 완전히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지난번 수선화를 보고 감정이입이 되어서 단숨에 쓴 글이었고 시까지 썼는데 모두 날려버리고 아직도 그 허무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글이라는 게 신기하다. 어떨 때는 술술 써지지만 한 줄도 못쓸 때도 있다.
대략 2주간의 성대한 파티가 곧 끝날 거라는 생각으로 수선화들은 버티고 있는 듯했다. 한켠에서는 바람에 지쳐서 핑계 김에 누워있는 꽃도 있었고 남보다 부지런을 떨고 일찍 꽃단장하고 나와서 이제는 반쯤 지워진 화장으로 이 파티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모습도 보였다.
한쪽에서는 파티장에 늦게 도착해서 아직 멀뚱한 수선화도 보였다. 이 파티장의 첫인상과 감정이 특별했어도 첫 번째는 영원히 한번 일 수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슬픈 향기에 취해보려고 이곳에 왔다
아득하게 밀려오는 향기 수선화
멀리서 찾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네
슬프도록 아름다운 향기 숨기지 못하고
담담한 얼굴로 나를 반기네
사랑이 두려워 고개를 떨구네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못하고 서성거리다 돌아선다
내 사랑 제주수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