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통화할 일도 많고 정말 바쁘시겠어요.”
남자가 통화를 끝내자 나는 침묵이 무겁게 느껴져 남자에게 말을 붙였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일의 고충을 늘어놓았다. 나를 조금 친근하게 대하는 것으로 느껴져 한편으론 기뻤지만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나에게 직장이 어디길래 이 지역에 집을 구하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 잘 모른다고 했다.
“집을 먼저 구할게 아니고 직장을 구해야죠. 나중에 진짜 고생해요.”
남자는 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서울은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출퇴근 하다보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일이 생길 거라는 게 남자의 요지였다. 나는 남자의 이야기를 대체로 수긍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도 직장을 구하면 근처로 거처를 옮길까 생각해 봤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그러면 서울에 무슨 일로 올라왔냐고 물었다. 나는 또 머뭇거렸다. 내 계획을 공유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정말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이번에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남자는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대답이 궁금했다기보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에게 물어봤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대답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따분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성공한 학교 선배의 무용담을 듣는 신입생의 눈빛으로 경청하기로 했다. 이야기의 골자는 이랬다. 자신은 지금 이 지역 부동산 업계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이지만 이 일이 만족스럽지 않아 곧 다른 사업을 할 것이며 예전엔 요식업에 적을 뒀다고 했다.
“진혁 씨, 정말 사회 쉽지 않아요. 믿을 사람이 없어. 배달기사들이 현금 받고 나한테 이야기 안 하고. 그때는 가게에서 배달기사를 고용해야 했었거든. 새벽에 청소 아줌마가 돈가스 빼가고. 진짜 미친다니까요.”
나는 돈가스 가게를 했다고 말하는 것과 요식업에 적을 뒀다고 말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돈가스를 빼가는 아줌마를 CCTV로 보다 새벽에 혼자 분개하는 넙치가 상상이 되어 하마터면 웃음이 날 뻔했다.
“진짜 보통 일이 아니었겠어요.”
“네. 사람 피 말려요. 요식업 시작하지 마세요.”
나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는 않아서 땅만 보고 걸었다.
남자는 지은 지 4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빌라 앞에서 멈춰 섰다. 빌라 입구에서 노인이 가래를 크게 모았다가 뱉어댔다. 남자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남자가 노인의 욕을 하는 것이 듣고 싶지 않아서 시선을 피했다.
“외관은 별로 안 좋죠? 근데 이런 집이 오래되어 보여도 정붙이고 살기 좋아요. 전세 1억 2천. 진혁 씨 예산 안에도 들어오고. 일단 한번 들어가 보죠.”
집 안에 사람은 없었지만 옷가지를 보아 할머니가 사셨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벽지 한 곳에 곰팡이와 바닥 쪽에 물이 올라온 흔적이 눈에 띄었다. 남자는 나보다도 먼저 벽지와 바닥을 짚으며 말했다.
“집주인한테 물어보니까 위에 방수공사는 이미 다 해서 이제 물 샐 일 없다고 하고요, 밑에 물은 그 공사 전에 샜던 건데 할머니가 그냥 사셨던 거라네.”
나는 괜히 수도꼭지를 열었다 닫았다. 남자는 집 주인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 공사 다 된 거 맞죠? 네. 네. 창문도? 좋죠. 제가 이 분한테 말할게요. 요즘 젊은 사람들 나무 창문 안 좋아해요. 사장님 알죠? 장판도 하얀색으로 하고 또 유리도 초록색 그런거 하지말고. 맞죠?”
남자는 주인과 통화하는 내내 나와 대화하는 듯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자는 전화를 끊고 이 집으로 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집이 마음에 안들었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10점짜리 집은 없어요. 손님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겠는데 어차피 평생 사실 것도 아니고 안 그래요? 내 집도 아닌데 조건 어떻게 다 맞출 수가 있겠어요? 그냥 6점, 7점 좀 괜찮다 싶으시면 잡으셔야 되는 거예요. 요즘에 이런 매물 정말 없어. 또 전세로 구한다며. 요즘 집주인들이 다 월세 받으려고 그러지 누가 전세해요. 손님이 집주인이라도 안 그러겠어요?
내가 집주인이면 나도 월세를 받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진혁 씨 지금 걸리는 게 뭔데요. 도배랑 장판은 다 해준다고 했고. 아니 그러면 한 달에 집값으로 얼마 정도까지 생각하세요. 얼마까지 낼 수 있으세요?”
나는 도배와 장판에 문제가 생긴 집에 사는 할머니를 모른 체 하는 집주인을 상상했다. 바닥에서부터 물이 올라와 검게 물결이 생겨난 나무 장판이 할머니의 검버섯처럼 느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