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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영수 Sep 28. 2024

[9]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나는 작게 말했고 남자의 얼굴은 크게 구겨졌다. 나는 왜인지 자꾸만 그 남자의 돈가스 가게의 현금을 빼돌린 배달 기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남자의 취조 끝에 드러난 죄로 재판까지 오르고 최종 변론도 실패하여 결국 수감 되는 죄수. 나는 남자와 다시 부동산으로 호송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저는 여기서 그냥 걸어서 갈게요.”     

 이 남자는 나를 이 동네라는 레고 블록에 끼워 넣으러 온 것이다.     

 “제가 그럼 좀 더 노력해 볼게요. 내일 한번 더 오세요. 오전 열시에 오실 수 있어요?”     

 남자는 옆구리에 낀 다이어리를 꺼내 무언가 빼곡히 적힌 칸들을 나에게 보여주듯 펼치고 내 응답을 기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다이어리에 뭔가를 적었다. 나는 미궁에 실시간으로 빠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고 나는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헛으로 하며 반대로 걸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친구의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는 오늘 출장을 가서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허기가 몰려들었지만 무언가를 먹는 일 자체가 번거롭게만 느껴져 목만 축였다. 침대 끝에 털썩 앉고 나니 무언가 나를 어딘가로 밀쳐내고 있다는 느낌이 머리를 퍼뜩였다. 나는 본격적으로 누워 친구의 침대 안으로 더 깊이 몸을 넣었다. 빈 소라를 찾아내 서둘러 몸을 넣는 소라게가 떠올랐다.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외투를 챙겨 1층으로 내려오니 어떤 여자가 먼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타이밍에 담배를 피우러 내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척하며 괜히 근처까지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곁눈으로 흘겨본 여자는 집에서 바로 나온 듯 수면 바지를 입고 있었고 상의는 가슴께가 푹 파인 반팔을 입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어 전봇대 주위의 쓰레기들을 보는 척했다.      

 “또 보네요.”     

여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여자는 쪼그려 앉아있었다.     

 “본 적이 있나요?”      

나는 여자 쪽으로 고개만 돌리며 말했다. 여자는 입꼬리에 미소를 담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보니 가슴 깊은 곳까지 시선이 닿았다. 나는 여자 쪽으로 돌아섰다.     

 “그때 경찰 왔을 때.”     

여자는 바닥에 침을 뱉느라 뒷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노인에게 소리치던 여자가 이 여자인지 그걸 지켜보는 중에 누가 지나가며 나를 본 것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기에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나는 여자에게 다른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생각해보니 딱히 궁금하거나 물어볼 것이 없어서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그거 맛있는데”     

여자가 내 담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 드릴까요?”     

나는 담뱃갑을 열어 권했다.     

 “아뇨. 괜찮아요. 주변에서 담배 끊으라고 안 하세요?”     

 “네. 저도 맛있어서 안 끊으려고요.”     

 “그렇죠. 근데 어른들은 모르나 봐요. 이렇게 맛있는데. 혹시 여자친구 있어요?”     

여자는 계속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한쪽 다리를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멈췄다. 그 여자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며 추운 듯 팔을 교차해 자신의 양팔을 빠르게 비비며 웃었다. 가슴이 흔들렸고 나는 그것이 나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라고 느껴졌다. 명치끝 부분이 뻐근해졌다.     

 “아뇨. 남자친구 있으세요?”     

 “네. 저는 있어요. ”     

여자는 귀 옆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으며 말했다.     

“근데 요즘 담배 뚫기가 너무 어려워요. 저 18살이에요”     

나는 여자가 18살이라는 사실보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점이 더 불쾌했지만 두 가지 사실 모두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자친구가 담배를 사다 줘요?”     

나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며 물었다.     

 “아뇨, 아는 호구 하나 있어서 부르면 와서 사주고 가요.”     

나는 여자가 호구에게도 가슴을 보여줄지 아니면 호구에게만 보여주는 것인지 생각했다. 여자는 다시 팔짱을 끼고 가슴을 한껏 모아 몸을 앞으로 숙였다. 가슴 굴곡 사이의 옅은 갈색 점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나는 여자가 내 시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초점을 풀지 않았다.      

 “저 만원 드릴 테니까 지금 피고 계신 거 두갑만 사다 주시면 안 될까요?”     

나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편의점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여자는 계속 웃었다. 편의점에서 담배 두 갑을 샀다. 그리고 담배 두까치를 태우는 동안 그 여자에게 느꼈던 정욕만큼 자기 손으론 담배도 사지 못하는 그 여자의 검지와 중지를 가여워하는 데에 할애하기로 마음먹었다. 담배 두 갑을 여자에게 내밀며 돈은 안 받겠다고 말했다. 여자는 기뻐 보였다.     

 “감사합니다. 혹시 몇 호 사세요?”     

 “301호요.”     

 “저는 101호에요. 먼저 들어갈게요.”     

나는 공동현관 앞에서 여자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 집 창문을 바라보며 나의 상경에 대해서, 광화문에 대해서, 회사에 대해서, 전셋집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 담배에 대해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불어온 바람이 반지하 집의 찐득한 냄새를 나에게 가져왔다. 나는 불쾌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아서 친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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