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망하지만 꿋꿋하게, 다시 다녀볼게요
직장생활에서 퇴사 번복은 꽤 많이 일어난다. 노동자의 퇴사 의지가 변경되어 취소하는 경우도 있고, 회사가 좋은 대안을 제시해서 다시 눌러앉는 경우도 있다. 생각보다 회사가 제안하는 연봉이나 휴가는 달콤한 경우가 많고, 노동자의 의지는 익숙한 회사라는 안정감과 당근에 꽤 자주 꺾인다.
나는 10년 차의 직장 생활 동안 딱 한번 퇴사를 번복했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첫 회사에서, 혼자 인도여행을 가야겠다며 2년 차에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여성이었던 출판사 대표님은 '진심으로 말하건대 인도는 안된다'라고 나를 말렸다.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아냐며, 다른 곳은 몰라도 인도는 안된다며. 여행지 때문에 퇴사를 말린 그분도 그렇지만 또 나는 나대로 인도가 아니면 딱히 일을 그만두고까지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나지 않았는지 얌전히 눌러앉았다. 그러고 1년을 꼬박 더 일한 뒤엔 라오스를 가야겠다며 다시 퇴사를 공표했고, 그때는 대표님의 만류를 잘 뿌리치고 결국 여행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2년 차에는 인도도 안 가는 게 맞았고 퇴사도 안 하는 게 맞았다. 잘 말려주셨습니다, 대표님. 그리고 3년 차에는, 그게 어디로 가는 여행이었든지 떠나는 게 맞았다. 그 후의 나의 경력을 돌이켜보건대 그 첫 회사가 더도 덜도 말고 3년의 기간으로 이력서 첫 줄에 머물러주었기에 가능한 커리어였다. 적당하고 알맞은 퇴사 번복이었다.
이후의 나는 단호해졌다. 확고한 퇴사 결정 후 대표에게 할 말과 이후 플랜을 공표하며 원하는 날짜까지 정해서 대표실에 들어갔다. 노련한 퇴사자가 되었다. 20대는 모두 이직처를 구하지 않고 퇴사를 먼저 결심했다. 원하는 대로 이직이 안되면 짧게 알바를 하기도 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돌이켜보니 30대에는 반대로 언제나 이직할 곳을 구한 뒤 퇴사를 했다. 슬슬 경력직 짬빠가 되다 보니 사람들이 자리를 추천해주기도 했고, 회사 다니면서 연차 쓰고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던 점도 컸다. 내가 다닌 회사들은 2주 이상 휴가를 낼 수 있는 아주 자유로운 연차 제도였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떠나고 싶던 상황들도, 2주간의 긴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대부분 버틸만했다.
이번은 특수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버틸 수 없다! 고 생각하고 뛰쳐나가려 마음먹은 상황이었다.(2주 유럽도 다녀왔지만 나아지지 않더라) 퇴사 통보를 한 상황은 아래 글에서. 요약하자면 대책 없이 퇴사를 말한 뒤 꽤 행복하고 잠도 잘 온다는 글이다. 퇴사하겠다 말한 뒤 일주일 동안의 기분이었다.
https://brunch.co.kr/@wildweird/104
글을 쓴 뒤 대충, 나 혼자 그려보던 이직처가 모종의 이유로 갈 수 없게 되었고, 그러고 나니 갑자기 퇴사의 목적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근거 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원하면 이 업계에서 대충은 어디든 갈 수는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고 싶은 곳이 안 보인다는 것. 구인 자리가 없다는 게 아니라 내 커리어에서 다음 장을 채울 회사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잠이 안오기 시작했다.
적절하게도 지금 회사의 대표님은 내 불안과 걱정이 정점을 찍도록 딱 한 주를 더 가만히 두었다가 나를 방에 불렀다. 몇 주 휴가를 줄 테니 쉬고 와라. 그리고 새로운 걸 한번 해보자. 우리에겐 변화가 분명 필요하고, 의지는 충분히 있으니 같이 바꿔보자고. 나에게 지금 필요한 당근이 바로 그것이었는지, 나는 눈물바람 한번 쏟고 회사에 남겠다고 말했다.
친구들은 연봉 협상이라도 다시 하라고 성화였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단 잔뜩 생긴 휴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고, 퇴사를 한번 결심하고 나니 일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 쉬워졌다. 3년간 많은 프로젝트를 겪으며 너무 많이 쌓인 실패의 경험이 나를 짓눌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떠날 생각을 하고 돌아보니 작은 성공의 경험들도 자잘하게 쌓여있었다. 이곳에서 다시 새롭게 시스템을 바꿔볼 수 있다면, 한 번은 더 해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요가에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어깨와 귀가 멀어질 것'과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바닥을 힘껏 밀어낼 것'이다. 어깨는 의식하지 않으면 한없이 구부러지고 짓눌린다. 의식해서 계속 어깨와 목을 펴야 허리가 선다. 엎드렸을 때 손과 발로 바닥을 밀어내지 않으면 몸무게 때문에 팔다리가 무겁지만 바닥을 밀어내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더 이상 내 몸은 중력에 짓눌리는 게 아니라 반대로 몸을 들어 올리는 새 힘이 생기는 것이다.
난 특히 요가 수업 시작 시점에 바닥을 손바닥으로 처음 밀어낼 때의 감각을 가장 좋아한다. 하루종일 무겁게 몸을 지탱하던 다리에 힘을 주면, 눌리던 것을 밀어내는 새로운 힘이 생기는 기분이다. 이 회사에서도 매일의 일상에 짓눌리다가 다시 한번 팔다리에 힘을 줘볼까 한다. 어깨를 펴고 바닥을 힘껏 밀어봐야겠다. 지긋지긋하고 익숙한 내 자리에서, 다시.
+그렇지만 5개월 뒤 결국..
https://brunch.co.kr/@wildweird/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