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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Jun 09. 2020

아싸 직장인의 변명

점심은 혼자 먹을게요

이직한 지 한 달, 문득 내가 너무 아싸처럼 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팀원들과, 나머지 반은 혼자 점심을 먹어요. 정해둔 건 아니고 그나마 점심에 입을 열 수 있을 정도로 심적 여유가 있다면 같이 먹으러 나가는 거예요. 그 전 회사에는 점심시간이야말로 하루의 중요한 일과였죠. 누구랑 뭘 먹으러 갈지 아침부터 고민하고 메뉴에 대해 수다를 떨었어요. 지금은 일단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네요. 배가 고프지만 않다면 매일 멍하니 앉아만 있으면 좋겠어요.


야근을 하게 되면 누군가 저녁 식사를 시켜먹자고 제안하죠. 그 자리에도 저는 대부분 끼지 않았어요. 퇴근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 짜증이 폭발하는 지병이 있거든요. 누군가와 즐겁게 대화하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기능은, 그때쯤엔 이미 꺼졌어요. 타자를 칠 때마다 욕을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에요. 5초라도 일찍 퇴근하고 싶은 마음뿐이죠.


새로운 회사에 가서 인싸로 자리 잡으려면 이 모든 행동을 반대로 해야 해요. 점심이야말로 관계성의 최대 핫플! 회사에서 가장 활발한 사람부터 조용한 사람까지 한 명씩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야죠. 서로의 취미와 어제 본 드라마, 인스타그램에서 핫한 사진까지 공유하다 보면 친분이 생기겠죠? 팀원들과의 돈독함도 챙겨야죠. 사실 친분엔 담배가 최고예요. 흡연자들 사이의 친분이란 생각보다도 끈끈하고 쉬워요.


야근 저녁 자리도 수다 떨기 좋아요. 퇴근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났고 다들 일찍 집에 가기를 포기한 상태거든요. 분노와 절망, 허탈함이 더해져 회사 욕의 파티장이 되곤 하죠. 원래 친분이란 다 같이 절망에 빠졌을 때 다지기 좋잖아요. 그 자리에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서로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드니까요.


이 모든 친화의 장을 거부한 결과, '아 그 조용히 일만 하시는 분~'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아마 저를 점심도 거르고 자꾸 일만 하는, 말을 시켜도 지친 표정으로 빙긋 웃기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거예요. 처음으로 직장생활에서 겉돌기의 순기능을 찾은지라 굳이 포지션을 바꾸고 싶지 않네요. 아마 퇴사하는 날까지 이대로 지내지 않을까 싶어요. 밥 먹을 사람도 없는 정도로 외롭진 않으니까요.


인싸와 아싸, 직장생활에서 이 둘을 모두 경험해본 결과 각자의 장단점이 있다는 뻔한 결론에 도달했어요. 회사 내에서 보드게임 동호회를 열고 저녁 모임을 갖는 인싸의 삶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죠. 삭막한 직장생활에 약간의 단비가 내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점심이 즐거워요. 좋은 사람들과 재밌는 대화를 한 시간 동안 나누고 돌아오면 오후 시간도 금방 지나가죠. 화장실이나 휴게 공간에서 짧게 나누는 수다도 재밌어요. 농땡이 부릴 기회도 더 많고요.


직장에서 아싸라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어요. 점심시간에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수다 떠는 시간을 줄여 일을 더 할 수도 있죠. 하루 종일 대화를 해야 하는 직장인이라면 점심시간만큼 달콤하게 쉴 수 있는 시간도 드물어요. 쓸데없는 감정 소모나 구설수에 휘말릴 일도 없죠. 직장생활의 모든 것이 깔끔하고 시원하고 단순해져요. 그리고, 외로워져요.


최악의 회사여도 사람들끼리는 얼마든지 돈독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거쳐온 수많은 거지발싸개 같은 회사들에서도 직원들끼리만큼은 세상 친했거든요. 즉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회사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절대 불명의 진리는, 사람들과 친해질 여유조차 없는 회사라면 일단 좋은 회사일 리가 없다는 거겠죠. 그런 곳에서, 점심을 안 먹고 일을 한다 해도 제시간에 업무가 끝나지 않는 회사에서, 아싸로 지내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에 살기 위해 초콜릿을 뜯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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