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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Aug 25. 2020

불행하지 않을 수 있는 업무량

대단한 워라밸을 바라는건 아니지만

대표에게 '일이 많다'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똑같아요. 이 말을 안 한 대표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네다섯 명의 대표들을 거쳐온 결과, 직원이 업무량이 많다고 하면, 그들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야근 안 하잖아'


회사 대표들의 필연적인 사고방식인가 봐요. 말로는 맨날 야근하지 마라, 효율적으로 일해라 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사람들이 야근을 좀 했으면 좋겠고, 칼퇴하면 얄미운가 봐요. 말인즉슨 직원들이 매일 야근하고 법카로 저녁 사 먹고 연애도 못하고 운동도 못 가고 자기 삶도 없이 밤늦게 퇴근하면 그제야 '일이 많은가..?'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대표들의 이 사고방식을 가장 잘 이용하는 사람이 바로 윗분들이에요. 그들은 일이 없어도 꼭 회사에서 저녁을 챙겨 먹고 책상에 앉아서 야구를 보더라도 집엘 안 가요. 그렇게만 해도 대표는 그들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하루 꽉 채워 일하고 빠릿빠릿하게 퇴근하는 사원들은 이기적이고 눈치 없고 일도 많지 않은데 자꾸 징징대는 걸로 보입니다. 그 불균형 때문에 분노가 생기고 퇴사자가 생기죠.


지금까지 총 네 군데의 회사를 다녔는데 그중 2곳에서는 야근을 밥 먹듯이 했고, 나머지 2곳은 정시 1초에 벌떡 일어나 칼퇴를 했어요. 4곳 모두 각각의 큰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큰 차이가 있다면, 칼퇴하는 2곳에서는 제가 좀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사람들과 웃고 일상 이야기도 하고 점심에 보드게임도 하고 잠시 나가 커피도 마셨어요. 입사 초기에는 '여기가 나의 평생직장인가?' 하는 생각도 했고요. 물론 회사들이 가진 필연적인 문제 때문에 결국엔 퇴사를 했지만요.


야근하는 회사 2곳에선 단언컨대 행복이 없었어요. 그걸 보상받을 정도로 돈을 많이 받지도 않았어요. 거긴 그냥 그런 회사들인 거예요. 수많은 이유로 인해 일이 많은 회사. 인력 부족 때문일 수도 있고 비효율적인 업무 시스템 때문일 수도 있겠죠. 그 문제를 한 두 명이 해결하기란 불가능해요. 참아내느냐 나가느냐의 결론만 있어요.


현대 사회에서 야근만큼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건 없어요. 저녁 없이 산다는 건 일상을 오직 업무로만 채운다는 뜻이에요. 일은 그렇게 함몰될수록 점점 크고 무겁고 버거워져요. 퇴근이란 원래 일을 끝내고 가는 게 아니라 끊고 가는 거잖아요. 산뜻하게 끝낼 수 있는 업무란 세상에 없으니까요. 일을 완벽하게 하자면 아마 영원히 할 수도 있을걸요?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깊게 파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영화 '메기'에서 이 대사를 듣고 깨달았어요. 지금 내가 일에 매몰되어있다는 걸. 아침에도 한 시간 일찍 출근하고 점심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일하고 퇴근을 밤 10시에 해도, 일은 끝나지 않아요. 그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업무 때문에 점점 불행해지고 있어요. 욕을 먹어도 업무가 안 끝나도 일찍 퇴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오늘 아침에 마음을 먹었지만 지금도 1시간 야근을 했고 어두운 퇴근길에 이걸 쓰고 있네요. 우리가 불행하지 않을 수 있는 업무량이란 과연, 현실의 어드매 즈음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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