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단편이고 인생은 단편집이야. 그리고 난 네 편이야.
어제 밤에는 글을-글이라 할 것도 없는 것들을- 임시저장해두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는 건 죽는 것보다 어려운데 왜 우리는 죽는 것 대신 살아가나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삶에서 매몰비용 때문일까 했었다. 사는 건 아득바득 연명해가는 것이고 쉽게 부러지는 샤프심으로 꾹 눌러 길게 질질 끌어내는 것이다. 연명하는 건 종이와 흑심의 마찰이다. 샤프심은 얇디 얇으니 마찰열도 종이 사이 저항도 적을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미비하고 미약한 것이다. 하지만 고작 샤프심이기에 그가 받는 마찰과 저항은 어마어마하다.
친구에게 메신저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7:01 PM 그냥 고만고만해서 잘 되는 것도 고만고만한 것 같고 힘든 일도 고만고만한 거 같은데 내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나한테 넘 버거움ㅋㅋㅋㅋㅋㅋㅋㅋ
7:03 PM 이건희의 업앤다운과 내 업앤다운은 아예 클라스부터가 다르니까
7:03 PM 걍 자기 레벨에 맞는 업앤다운 흐름이 있나 보아
제마다 맞는 고난과 역경을 온몸으로 마주하지, 우주와 샤프심의 그것들은 크기가 다르지, 우주와 샤프심이 크기가 다르듯.
우주는 우주의 역경을 이겨낼 것이다. 샤프심은 우주의 역경을 이겨내지 못한다.
툭툭 부러져 표면적이 넓어질수록 마주할 저항력도 세진다. 마찰은 빚어내기 싫으나 삶이 마찰인지도 모른다, 종이에 제 몸을 비벼 까만 줄을 이어가야 한다, 삶은 마찰일지도 모른다, 샤프심의 마찰은 너무나도 힘들다.
삶은 드라마가 아니지만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쉽게도 읊조린다. 너답지 않아. ‘나다운 게 뭔데?’ 드라마나 삶이나 뻔하디 뻔하다만 무어가 다른지는 너도 나도 알지. 우리는 알지, 그래서 침묵하지.
내가 쓴 댓글을 살펴보다가 몸이 아프면 위로와 배려를 해주지만 정신이 아프면 조언을 하려 한다는 말을 보았다. 그런 걸로 슬픈 것은 아니다. 오래된 사람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이해하지 못 한다는 말도 이해한다는 말도 상처,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는 일 투성이다.
차라리 몸이 아프다면 사람들이 동정이라도 해줄 텐데 하는 마음이었지만 막상 몸이 아프기 시작하니 마음도 덩달아 더 아파졌다. 몸과 마음 간 괴리는 사라졌을 일이나 둘 다 일관성 있게 아픈 일은 더 심연 속으로 빠지는 일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결국 나는 저 무저갱 아래 속으로 더 가라앉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무엇입니까?”
‘나다운 게 뭔데?’ 심리테스트를 할 때마다 늘 마주하는 질문, ‘진정한 나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그렇다와 그렇다 사이에서 내 샤프심을 질질 끌어왔지.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은 거라던 오동구 대사는 언제까지고 머릿속을 울려댄다.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은 거야.’
사람들 앞에서 밝아지는 게 나인지 길을 걷다가 갑자기 울컥하는 내가 나인지 모르겠다. 그런 나를 나는 어떻게 질질 끌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를 일이다. 회사에서도 내 삶에서도 모르는 일 투성이다. 모르는 일로 가득한 일관성 속에서 내 사이 괴리감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게, 설명할 수 없게, 받아들일 수 없게 해버린다. 그렇게 매몰비용의 함정에 빠져서 질질 끌어가는 것이다.
가라앉고 질질 끌어가고, 둥둥 부유하고. 참 많은 것을 하는 인생이구나, 피곤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