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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혜나 Sep 08. 2023

2019.09.18

일상은 단편이고 인생은 단편집이야. 그리고 난 네 편이야.


신문 기사를 끼적이면서 이제 나는 감정이 남실대는 글은 쓰지 못하겠노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스케치, 르포 기사가 너무 어려워서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는 게 사실 제일 편하다- 여느때와 같이 글쓰는 건 쉬운 일은 아니나, 글쓰는 걸로 먹고 삶에도 글쓰는 건 여즉 퍽 쉽지 않다.

글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쓰고 싶은 사람이 되어 언제든, 늙어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살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다. 그때는 그렇고 지금은 아니다 하면서 슬프게 활자를 끼적이는 것은 아니다. 과거형으로 썼다고 해서 과거일 뿐이라는 건 더더욱 아니다. 감정을 느낄 때 글을 쓰게 된 것에 행복할 따름이다. 슬프면, 우울하면 까만 활자로 와르르 쏟아낼밖에 없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정말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집에 가면 꼭 글을 써야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쓰려던 글은 2시간이 지난 지금 어렴풋이 그랬었지 짐작만 할 뿐이다. 정말 착각이었다.

난 글을 쓸 때 참 많은 인용을 한다. 그리고 내 인생이라는 책은 참 많은 에피소드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늘 한다. '저는 몸이 아프기도 했고, 마음도 아팠던 적이 있고요. 의외로 해본 것도 많더군요. 정치 관련해 일도 해봤고, 영어 유치원에서도 일해봤고요. 희한한 것도 많이 알아요. 잔지식도 많고요.' 하나하나 모든 내 순간들이 누군가가 만든 것의 인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명언 하나쯤 물어볼 때 나는 세 개 넘게 대답할 수 있어요. 나는 메모장에 백 개 넘는 명언을 적어두었어요. 시도 대답할 수 있어요. 한때 전 시를 모으는 취미를 지녔었답니다. 당신이 무언가에 대한 유래를 물어볼 때, 어쩌면, 아주 어쩌면 제가 답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건강에 대한 것은 아마 다 대답해줄 수도 있죠.'

산다는 말이 참 거창하다는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별 것 아닌 것에도 '산다'는 단어를 붙이면 거창한 말이 돼버린다."-그리고 이 문장은 또 내 글에 대한 인용이다-

'먹는다'. 이 또한 별 것 아닌 말이지만 '살다'와 같이 무거운 말이 됐다. '먹고 산다'는 건 얼마나 무거운 말일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요' 하고 너스레를 자주 떨곤 하지만 문득 '먹'고 '산'다는 것에 머리가 띵 하고 어지러울 때가 있다.

나는 살아남아 살고 있다. 잔뜩 염세적이고 자신을 지리멸렬하게 싫어하면서도 역설적이게 살아가고 있다. 또 다시 인용을 하자면 "너무나도 많은 힘듦을 겪으면서 '네가 억지로 연명해나가야 할 인생이 아니다, 지금 당장 생을 마감하라' 하고 신이 내게 힌트를 주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지금도 힘들지 않느냐. 힘들기 때문에 살아있는 게 무거워지고, 피부로 와닿는다. 내가 살아가는 것을 그렇게끔 깨닫고 싶지도 않고 유쾌한 일도 아니지만, 살아있기 때문에 아프구나. 그래서 죽고 싶다. 그런 생각이었다.

거울 앞에서 '나는 못생겼어, 나는 뚱뚱해, 이것 봐, 어제 먹은 소금 때문에 몸이 이렇게 부었어.' 하지만 지금은 눈을 감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정말 뚱뚱해. 거울도 볼 수 없어. 너무 비참하기 때문이야.'

한없이 말랐을 때 거울 속 나를 보며 너무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자책하던 내 모습이 생각나면 아찔해진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아찔한 건 지금의 나는 거울조차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옷 갈아입을 때조차 눈을 꼭 감거나 되도록 몸을 쳐다보지 않는다. 살찌고 둥근 몸을 마주할 때면 정말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정신이 아득해서 저 아래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듯할 때가 있다.

2년 정도 내 몸을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벗은 몸을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요,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어느 순간 나는 눈을 꼭 감고 샤워를 하고, 내 모습이 비치는 것을 혐오하며, 살찐 내 몸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사시사철 내내 긴팔과 긴 바지를 고집한다. 내 모습을 확인하고 싶을 때면 불투명하고 흐릿하게 보이는 유리창에 나를 비춰보곤 한다. 그때가 내 모습을 확인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 살고 싶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진 않았어. 어떻게 해야 할까.

살아남았기를, 살아남기를, 살아가길, 살아라, 너,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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