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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혜나 Sep 08. 2023

2021.12.10

일상은 단편이고 인생은 단편집이야. 그리고 난 네 편이야.


애당초에 나는 기질이 우울한 사람인 것을 문득 깨달았다. 억지로 밝고 명랑하게 꾸며내느라 지친다는 말을 늘어놓으려고 서두를 이리 던진 것은 아니고 그냥 정말 갑자기 깨달았다는 말이다. 아, 내일이 토요일이구나 따위의 깨달음처럼. 내일이 토요일인 걸 다시금 상기하는 건 부끄러운 일도 울적한 일도 아니다. 이도 그런 것이다.

넘어지는 게 두려운 것보다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야 하는 게 너무 귀찮고 지친다고 생각했는데, 지점토에 바니쉬를 바르며 곰곰이 생각해보자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넘어지는 것도 두렵고 다시 일어나는 것도 두렵지. 거기까지 생각이 들 때쯤 내가 친구에게 누누이 말하던 말이 또 생각난다. ‘사는 게 어렵지 죽는 게 어렵겠니? 죽는 건 순간이지만 연명하는 건 그 순간의 연속이라구.’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하며 살고 있는 게 아이러니다.

살아가는 게 이다지도 무서울 수가 없다.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철딱서니 없는 저 pseudo인간을 상대해야 하고, 때로는 고용불안정에 몸을 떨어야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에 내 뇌간을 터뜨려야 하고, 지금 나지막히 올려다 보는 저 나무의 잎새가 마지막 잎새가 아닐까 하는 기우도 해보고, 내가 지금 쥐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 과연 내게 앞날은 있는 것인가 따위의, 여차저차 늘 두려움 속에서 사는 형국인 거다.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들, 연속되는 불확실성, 충돌과 순응 속에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지점토에 바니쉬나 바르고자 했으나 바니쉬를 바르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해대니 참 웃긴 노릇이다. ‘어찌 해야 하는가’의 물음 속에서 ‘해야 하는 것’의 답은 얻지 못하니 그도 웃긴 지경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넘어진 것인가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것인가, 이도 아니면 애초에 누워 있었던 것인가, 의지는 있는가 하는 질문이 양 관자놀이께를 짓누른다. 이럴 땐 그저 침잠하여 우울한 것 외에는 달리 방도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혹자는 넘어지면 바닥에 있는 돌이라도 줍고 일어나라고 했으나 내게는 돌을 던져 멋진 파문을 일으킬 호수가 있는 것도, 조약돌을 놓을 정원 하나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도 우스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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