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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혜나 Sep 08. 2023

2018.03.05 산책 중 댈러웨이

일상은 단편이고 인생은 단편집이야. 그리고 난 네 편이야.

 외로워질 것. 엄마에게 좋은 딸이 되기를 포기했고 하나하나 내 행동 당위성과 감정, 표현 당위성을 표현하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냥 그것은 엄마 것이니까. 그러니까 나도 내 것을 말하면 된다. 굳이 내 것을 엄마 것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누가 이해하지 못 한다 해도 내가 이해하면 되는 거니까. 내 건 내 거니까. 지금 이해시키지 못한다 해도 ‘그냥 나는 이럴 거야’ 하고 통보하고 그걸 해나가면서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에 이해하지 못 해도 어쩔 수 없고. 그렇게 나는 엄마를 사랑하면서 엄마를 ‘포기’했다-전엔 포기라는 단어가 너무 불안하고 슬프고 버림받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엄마가 내게 어떤 심정으로 포기라는 말을 했는지 알겠다, 널 사랑하지만 널 포기해, 사랑하는 걸 포기하는 게 아냐, 너는 너니까 너대로 살아, 포기하는 건 어쩌면 인정이야, 너는 너고 나는 나야 하면서 선 긋고 싸가지 없게 구는 게 아니라 너는 너고 나는 널 좋아하니까 네가 그 방식을 해도 좋아하는 사람의 방식이니 내가 인정해야지, 자존심은 있어서 괜히 얄궂게 눈을 흘기며 인정이라 말하지 않고 포기한다고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진짜 확실히 인정할 기분은 아닌데 그렇다고 진정한 포기는 아니고 아아 그 중간쯤이야 하는 기분일 수도-

 엄마에게서 어느 정도 분리되었고 포기했다. 그래서 편해졌다. 하지만 나는 왜 계속 외로웠지? 엄마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잘 해줘야 해. 좋은 친구가 되어줘야 해. 걔는 너무 착하고 나한테 잘해주니까 내가 상처 주면 안돼. ‘외않되’? 그리고 내가 좋아한다 해도 서로 사맞디 아니하면-잘못된 표현을 하거나 표현을 제대로 안 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내가 좋아하면 그 사람 발톱때도 사랑한다며. 물론 그런 맹목적인 건 힘들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포기’가 필요하다는 거다. 엄마한테서도 그랬듯 친구로부터 분리되자. 똑같이. 엄마한테 분리되고 친구한테 붙었다. 너는 너니까 그냥 너대로 분리되자. 

맹목적으로 좋아하길 포기한다. 그리고 내가 널 아끼는 걸 정확하게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백 퍼센트 표현할 수 있다는 욕심을 포기한다), 서로 사맞디 아니하면 어쩔 수 없이 계속하기를 포기한다. 네게 마냥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한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한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게 하기엔 내가 아깝고 힘드니 나를 선택하고 남을 포기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포기 못하고 ‘내가 이래도 날 떠나면 안돼’ 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으로 더 떠나보내는 게 병신 같았다, 아니, 그리고 아직도 그런 내가 병신 같다. ‘엄마가 날 버리면 어떡하지?’ 불안해하고 엄마, 나가지 마. 엄마, 나랑 이야기 해. 엄마,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엄마가 날 버릴 거 같아 불안하단 말이야! 하지만 이젠 ‘엄마가 그런 말 해도 날 사랑하는 거 아니까’. 내가 진심이 아니듯 엄마도 진심이 아닌 걸 아니까. 엄마는 여전히 날 사랑한다는 걸 믿어. 

 근데 결국 또 믿음 문제인가? 내가 널 믿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 미안한 건 아냐. 그냥 내가 서툴러서 널 못 믿었던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진짜 인연이 아니어서 못 믿었을 수도 있고. 앞으로 믿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건 나 하기 나름이지만 반대로 네가 나한테 하기에도 달렸지. 상호관계, 상호작용-막무가내로 ‘난 이러니까 싫으면 꺼져, 좋으면 남아’ 하면서 인연을 계속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기라-

 외로워질 것. 그러면 외로워지지 않는다. 남에게서 나를 ‘분리’해서 외롭게 만들자. 외롭다고 남에게 기대지 말 것. 외로움은 혼자 해결할 것. 그게 결국 안 외로워지는 방법이다. 이제 알겠다. ‘네 일은 네가 해결해야지, 남에게 기대선 안돼. 외로워도 남한테 기대지 마’. 이 말이 너무 서운하고 서글펐는데 음, 맞는 말이야. ‘포기냐 인정이냐’와 같이 한끗차이. 그때 내가 몰랐다가 지금 깨닫듯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더 이상 저 말에 서운해 않기를 바란다. 아니면 이미 이해하고 내 글에 공감하고 있기를 바란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우선 코끼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외로워지지 않으려면 외로워져야 한다. 외롭다는 말이 그다지 슬프고 서러웠는데 지금은 견딜 만한 단어로 들린다. 그래, 외롭지 않으려면 외로워져야지. 




 어떤 사람이 날 이유 없이 싫어한다면 나를 싫어할 이유를 만들어주라고 했다. 생뚱맞은 이야기이지만 그냥 모든 사람한테 좋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어서 그 사람도 나를 개차반으로 대하는데 나는 왜 을이 되어서 쩔쩔매야 하는가. 그냥 아까 병원 예약 변경하다가 안내원이 너무 싸가지 없어서 나는 이런 한심한 사람이라 이렇게 한심한 취급을 받지’ 우울해하다 갑자기 울컥했다. 아니, 내가 앞으로 더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한테까지도 이렇게 나는 한심하다고 깎아내리면서까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가? 내 잘못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건가? 아니, 내가 내 돈 내고 병원 가는 건데 내가 왜 ‘나는 쓰레기야, 미친듯이 울고 싶어’ 하면서 자책해야 해? 생각해보니 황당합니다. 나는 병신이군.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미안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너무 싸가지가 없었는데 그 싸가지 없는 게 그냥 없었다면 몰랐겠지만 그 불쾌함이 내게 우울함을 줘서 나를 불안하게 하고 울게 만들었으니까. 당신이 싸가지 없게 대한 것은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죠! 미안하게 됐슴다! 거 되게 까칠하시네! 이렇게 넘어가자. ‘미안해요, 진짜 나는 어쩌면 좋니..’ 이러지 말자. 

 물론 어떤 사람이 이유 없이 내게 좆같이 군다면 그 좆을 만들어주면 된다. 나는 거대 인간 좆이다. 너 내가 지금 여자라서 좆 없다고 무시해?-너무 상스러워, 근데 또 갑자기 생각난 게 ‘내 인생 내 멋대로 산다, 다 좆까! 마이웨이’ 이 말을 하면서 ‘왜 내가 집안일 하는 건 마이웨이가 아니고 도전하고 경험을 쌓아야 꼭 마이웨이인 거예요? 내가 여자라 좆이 없어서 좆 못 깐다 이거예요?’ 이런 농담을 하고 혼자 뿌듯해 한 기억이 나서 어이가 없다-




 천추의 한이라는 표현을 쓰다가 ‘천추라는 게 척추 천 개라는 건가, 척추에 새길 정도로, 잊지 못한 한인가’ 하다가 ‘추가 추억, 반추할 때 그 추여서 천 번 다시 반추해봐도 한이라는 표현이 아닐까?’ 하고 혼자 풀이를 해보았고 아주 흡족스러웠다. 




 어느 정도 강박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걸 강박이라 부르지 않을 용기도 필요하다. 강박을 갖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강박을 갖지 않을 용기는 필요하다.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 성공하는 자가 해야 하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주는 사회 속에서 압박 받지 않고 물 흐르듯 공기 흐르듯 유유히, 부유하면서 둥둥. 결국 이러든 저러든 그냥 용기 있는 자가 잘 사는 거넴ㅋ 비 브레이브,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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