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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혜나 Sep 08. 2023

2018.12.25

일상은 단편이고 인생은 단편집이야. 그리고 난 네 편이야.

 글을 쏟아내야 한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쏟아낸다. 쏟아낸다. 쏟아낸다. 와르르 쏟아낸다는 말 밖에는 쓸 도리가 없다. 쏟아낼밖에.

 쏟아낸다는 말은 굳이 거나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다지 중요한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포문을 열 때나 오물을 버릴 때에야 ‘쏟아낸다’고 하지 절대 중요한 일에는 ‘쏟아낸다’ 따위 말은 쓰지 않는다. 그러니 딱 그 정도인 것이다.

 와르르 쏟아낸다고 해서 쏟아진다면 좋을 일이나-노력의 경우- 그 쏟아낸 결과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거라는 건 퍽 슬플 일이다. 허나 언제는 그러지 않았는지. 그래도 그땐 썩 맘에 들었던 모양인 듯하다, 지금 이렇게 느끼는 걸 보면 말이다. 소가 여물을 씹듯 내 글을 찬찬히 반추하며 씹어먹을 땐 그냥 얼굴이 벌개져 나도 모르게 숨기고 싶어진다.

 뭐가 되고 싶은 건 언제나 그랬듯, 그리고 누구나 그러하듯. 타자의 욕망이든 내 진짜 욕망이든 욕망은 욕망이잖는가. 뭐가 되고 싶은가 봐, 무던히도. 그러면서 노력을 쥐뿔도 하지 않지. 매너리즘에 빠진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말을 했는데 사실 나는 이미 내 재미 없고 쓸모가 없는 쳇바퀴 돌리기에 매너리즘이 빠진 듯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힘이 들 땐 글을 써야 한다. 쏟아내야 한다. 이것도 어찌 보면 타성에 젖은 일일지도 모르나 분명한 것은 이 일로 조금이나마 내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누누히 말했듯 이건 언제까지나 와르르 ‘쏟아내기’ 용도니까. 실로 쏟아내는 것이며 쏟아내기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 흐름대로 지껄이며 쏟아내지만 그 안에 커다란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뭘 말하는지도 모른다. 물길이야 어디로 흐르는지 알지만 내 의식이 흐르는 길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 턱이 없다.

 나는 괜찮아야만 한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은 척을 해야 한다. 무언가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땐 그게 되길 바랐기 때문에 그게 되어야 했고, 지금은 그것을 바라지만 그것이 되지 못하기에, 오히려 그 반대에 있기에, 그 반대가 가질 수 있는 무언가를 가져야만 했다. 그걸 가지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든다는 건 그걸 미처 가지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그러니 나는 괜찮은 척을 해야만 한다. 나는 이제 괜찮아요. 끈임없이 눈치를 본다. 왜냐면 전 이렇게 된 이상 그때보다 더 행복해져야 해요. 행복해 보여야 해요. 더 이상 실패자가 되기는 싫거든요.

나는 행복해요. 나는 아무렇지 않아요. 항상 내게 들러붙는 말은 ‘무던하다’는 말이다. 너는 참 무던히도 노력하고 무던히도 눈치를 보지. 무던히도 말이다. 어련무던하다는 뜻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 그렇지? 어지간히도 무던히.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무던히 노력을 해야 할까. 엉엉 울고 싶어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엉엉 운다고 해서 나아질 건 없지만 울지 않는다 해서 또 나아질 건 없다. 결국 어찌 하든 나아질 건 없다. 나아질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아진 걸까? 그것도 모른다. 나아질까? 그건 당연히 모른다. 나빠질까? 더더욱 모를 일이다.

 수정하지 않고 글을 쓴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특히나 이렇게 쏟아낼 때에는. 덧붙이고 수정하고, 미사여구를 붙이고, 더 큰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흔히들 말하는 ‘설명충’이 되어 또 나를 ‘무던히’ 설명하는. 하지만 지금은 하지 않으련다. 큰 소리를 내면서 타닥타닥 글을 쏟아낸다. 내용이 어찌 되든, 이해가 되든 글을 존나게 잘 쓰든, 아니면 글이 개좆 같든 뭘 하든 좆도 상관이 없다. 욕이 상스럽든 뭐 어쩌구든 저쩌구든.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든 어쩌든. 좆도 상관이 없다 이 말이에요, 나는. 쏟아내는 것에 언제는 뜻이 있었답니까? 쏟아내는 것은 언제나 버리는 것입니다. 흘려 보내는 것이고요. 떠나 보내는 것이에요. 이 글이 메모장 한 구석을 계속 차지하면서 나중에 또 보고 또 볼지도 모르는 일이나-저는 제 글을 쉽게 삭제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글쎄요, 그렇든 안 그렇든 저는 오물을 쏟아내듯 글을 쏟아냅니다.

 내일은 뭐가 더 나아지겠습니까?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그래도 말입니다, 오늘 노력하면 내일이 더 나아진다고 모두들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한 번도 노력하지 않았던 걸까요? 아니면 제 이상이 너무 높은 ‘탓’입니까?

 왜 내일이 나아질 거라 생각을 못하냐고, 너는 나아진 게 아니라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글쎄요, 나아질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 자체가 그렇게나 다른-일반적인 생각과 다를 뿐 틀린 건 아니니까요- 일이라면 여전히도 아픈가 봅니다. 근데도 이렇게 나는 아픕니다, 배 째시오, 하고 이죽대는 꼴을 보면 또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지 않나요?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탓을 논해야 하는 건가요? 누군가를 탓하느니 자기 자신을 탓하라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탓하는 건 지겹습니다. 이미 많이 쥐어짜고 울어댔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쏟아낼 말이 없습니다. 네 탓도 내 탓도 아니고 싶어요. 그만 탓해라. 그래요, 그 누구의, 무엇의 탓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어찌 이렇게 불분명할까요? 5년 전의 저도, 2년 전의, 1년 전, 그리고 지금의 저도 삶의 불분명함이 무섭습니다. 공포감에 자지러질 지경입니다. 언젠가 한 번은 기함한 적도 있고 꽤 여러 번 공포스러워서 몇 달 꾸준히 약을 들이킨 적도 있습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큰 자랑은 아니지만요, 제가 이 말을 꺼내는 건요, 제가 그나마 조금 더 나아졌다고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무던히’도요. 그리고 나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괜찮다고요. 너는 이제 괜찮다고.

 허나 그때도 지금도 분명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요. 그래서 항상 수학이 부러웠습니다. 답이 똑 떨어지니까요. 동경일 뿐이지 잘했거나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고요. 중구난방 어지러이 뿌려대는 글자들이 가득한 이 글을 보면 딱 보이지 않습니까. 이건 수학적인 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답이 안 보이거든요. 의도가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 답도 보이지 않을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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