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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Mar 25. 2016

한 지붕, 두 가족

인공지능로봇과 저널리스트는 상생할 수 있을까?




 서기 2045년.

미래로 가본다. 인류는 예기된 운명과 맞닥뜨린다. 거리엔 미화원과 쓰레기통을 대신한 청소봇(Bot)이 인구 비례 500명 당 1개 꼴로 비치되어 있다. 은행 창구엔 친절한 마스크의 행원봇이, 식료품점 계산대엔 상냥한 미소의 캐셔봇이, 아파트 입구엔 관리봇이, 식당엔 혼밥족을 위한 밥친구봇이 존재한다. 자취방엔 애완봇이 몽똑한 합금 꼬리를 흔들며 주인의 귀가를 맞는다. 숨 틀어막고 치워야 할 배변도 없고, 계절마다 돈 푼 깨나 깨 먹던 예방접종비도 아낄 수 있다. 잠자는 동안 전원을 내리면 되니 낑낑 앓는 소리로 주인의 안면을 훼방 놓을 일도 없다. 사람 간 대화에 신물을 맛보던 사람들은 대화봇을 찾았다. 대화봇을 [공감과 반응] 모드로 설정하면 말의 꼬리를 물고 적절한 리액션이 재생됐고, [적극적 대화] 모드로 맞추면 곧 떠버리로 변모했다. 배려와 눈치가 불필요한 대화에 사람들은 곧두선 신경다발을 잠시 뉘일 수 있었다. '말받이' 쇳덩이는 인간이 무슨 흰소리를 지껄이든 상대가 되어줬다. 사람들은 반박 없이 긍정만 보이는 대화봇에 중독되어 갔다.




단, 이때에도 '감정'만은 칩(chip) 속에 응집되지 못한다. '감정 이식'은 오직 인간에서 인간으로만 가능하다. 




 집과 거리를 점령한 봇들은 어렵잖게 언론사 내부로 침투한다. 처음엔 입력된 데이터 숫자를 주물거리는 수준에 그쳤던 기자봇들은 점차 진화했다. 국회 속기록을 부분 발췌해 기사화했다. 법원 판결문도 자유 인용했다. 그들은 난공불락이던 다언어의 장벽을 일격에 허물었다. 하나의 기사는 탈고와 동시에 50개 언어로 번역됐다. 언론사들은 번역을 위해 쓰던 돈과 인력을 플랫폼 개발이나 취재로 돌렸다. 기자봇들은 정보 처리 능력도 빨랐다. 데이터가 기계로 이식됨과 동시에 1000자짜리 기사 수십 개를 써냈다. 그렇게 아카이브에 쌓이는 기사의 개수를 하루 단위로 측정하는 짓은 아둔한 것으로 여겨졌다. 분 단위로 잘개 쪼개져 가상 세계에 전방위로 방사되는 기사는 이미 인구수를 압도했다. 그 가공할 속도에 멀미와 궁금이 일었다. 





 "기사를 알고리즘이나 경우의 수로 쓰나요?" 기자에게 물었다. 대답의 반은 긍정, 반은 부정이다. 긍정의 반은 기자봇의 영역이다. 부정의 반은 인간 기자가 갖는다. 기자봇에 이식되는 알고리즘은 필연에 기댄다. 에이 다음에 비가 나오도록 설계됐다면, 필연적으로 에이 다음에 비가 나온다. 인간의 시각에서 '어라? 의왼데?' 싶은 행위도, 결국 알고리즘과 경우의 수를 토대로 산출된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탐사보도와 칼럼은 개연의 문제다. 에이 다음엔 비가 와야 한다는 공식이 없을뿐더러, 뭐가 나와도 '신기할'뿐이지 '절대 불가'하진 않다. 이렇듯 로봇의 필연은 언제나 세상사 개연의 위협을 받는다. 개연과 변수의 키는 기자가 쥐고 있다. 즉, 기자는 기자봇이 놓친 예외의 지대에 존재할 수 있다. 




기자는 친절했다. 예시를 더해줬다. 


 한 남성이 등장한다. 그는 어느 날 집 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사인은 명확한데 범인은 불명이다. 아들의 신고로 외부에 알려졌다. 부검 당시엔 사후 15시간이 경과한 뒤였다. 유력한 용의자는 지체장애를 앓아온 아들이다.


  여기까지가 정보화된 사실이다. 인공지능은 이 내용을 알고리즘에 입각해 기사화한다. 어느 경찰서인지, 경찰관과 부검의의 진술도 추가로 적힐 것이다. 딱 그 정도가 기사가 된다. 왜냐? 여기까지가 정보화된 '팩트'이니까. 그 이상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입력되지 않은 여타 다른 정보는 묻지 않는 것이다. 그 이상이 있으리란 가능성도 제기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 기자는 자신이 놓친 요소가 있는지 궁금하다. 범인은 누구이며, 왜 죽였는지 궁금하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아들이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변수와 예외'를 져버리지 않는다. '글자화 된 정보를 맹신한다/의심한다'는 점이 사람과 봇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기자봇은 정보에 순종하며, 기자는 정보에 대항한다. 




때문에 기자는 '대체 가능성'에 몰두하지 않는다. 대신 필연의 기자봇과 개연의 기자, 이 두 주체의 상생에 골몰한다. 데이터 기반 기사 작성은 온전히 기자봇의 영역으로 인정된다. 다반사에 대한 기사 트래픽은 기자봇이 끌어오는 것이다. 대신, '왜'를 묻고 '정보'를 의심하며 오랜 기간의 추적과 개연의 계산을 요하는 탐사보도, 글자 그대로 '평'을 해야 하는 논평, 칼럼은 기자가 맡는다. 수용자도 기자봇이 전하는 "인간들은 이렇게 하도록~"의 당위엔 반감을 느낀다. 인간이 말하는 인간의 도리만이 정언正言으로서 힘을 갖는다. 때문에 기자들은 기사 쓰기 스킬보다는 창의의 힘 기르기에 여념이 없다. 




 기자봇은 네모 직각의 공간에 주둔하며, 인간이 이식해 줄 정보를 순종적으로 기다린다. 기자는 현장에 존재하며, 능동적으로 의심하며 회의한다. 기자봇는 공식화된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의미를 만드는 '작의'를 행한다. 기자는 알고리즘 기사가 쓸 수 없는 '인간의 주장이 녹은' 분석 칼럼을 통해 '창의'를 행한다. 기자봇의 막힘없는 작의 행위는 저널리즘에 자동화를 선사하고, 기자의 천착 정신은 저널리즘에 심화를 돋운다.



한 지붕 두 가족을 추상한 그림. 아니 낙서. 아주 가관.



 서기 2016년. 

현재로 복귀했다. 위에서 제시된 미래상은 SF가 아니다. 논픽션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한 미래에, 맘봇이 등장해 아이에게 젖을 주고 끼니를 챙기고 옷을 입혀줄지언정, 그들은 엄마 자체를 대체하지 못한다. 저널리즘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작의作意'는 '창의創意'를 이길 수 없다.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무엇을 행해야 하냐고? 사실 철저한 무장은 필요 없다. 저널리즘의 기본만 하면 된다. 그런 의미로 우린 '읍참기자'를 행해야 한다. 어뷰징 기사만 써대는 기자들을 울며 참수해야 한다. 이것이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가할 역사적인 개혁 아닐까. 기계의 세계에서 '변수', '예외'란 곧 '에러'다. 나는 '에러나지 않는' 기자봇과 '창의적인' 기자의 필연적 상생과 개연적 협업을 낙관한다.




 참고 : 유엔 미래 보고서 2045 박영숙, 제롬 글렌 p33

2100년 : 인공지능을 이식하는 등 기계와 인간이 융합하는 트랜스 휴먼이 보편화된다.

2120년 : 인간의 두뇌나 마음을 사이보그 등으로 옮기는 기술이 완성되면서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2130년 :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휴머노이드가 등장한다.




 그리고 오늘 글은 지극히 애정일로의 글임을 인정한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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