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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Mar 27. 2016

프로스트 vs 닉슨 2008

역사적 설전(舌戰)을 다룬 인터뷰 스릴러

민주당의 선거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한 워터게이트 사건(1972), 은폐 사실이 드러나자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자진 사임한다.


1974년 8월, 전 세계적으로 무려 4억 명의 시청자가 닉슨 대통령의 사임 장면을 지켜봤다. 영화는 워터게이트 파문으로 불명예스럽게 사임한 닉슨의 몽타주로 시작해, 재기를 꿈꾸는 퇴물 MC 프로스트의 기막힌 기획안으로 이어진다. 바로 도청에 대한 전직 대통령의 ‘완전 전면적 자백’을 받아내겠다는 도전. 영화는 실제로 1977년 방영된 뉴스 프로그램 <닉슨과의 대담>을 재현한다. 


당시 타임지 표지(1977.5월호)에 실린 <닉슨과의 대담>


누구 편을 들겠는가. 링에 오른 선수 둘 다 참별로다. 

미디어를 이용해 정계에 복귀하고자 하는 정치인, 그런 정치인을 끌어내려 부를 얻고자 하는 방송인. 심지어 방송인 프로스트는 백기사 같은 존재가 아니다. 정치적 신념이 있기는커녕 투표 한 번 해본 적 없는 일개 토크쇼 진행자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 프랭크 랑겔라(리차드 닉슨 역)과 마이클 쉰(데이빗 프로스트 역)


어느 순간, 우리는 이 게임의 충실한 관객이 된다.

단순한 사실만 나열한 영화라면 5개 부분씩이나 아카데미에 오를 리 없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2001)>로 잘 알려진 론 하워드 감독은 관객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언더독 효과’, 즉 강자에게 밀리는 약자 편에 서고자 하는 심리가 자연스레 시냅스를 타고 요동친다. 인터뷰가 거듭될수록 닉슨이든 프로스트든 응원하게 된다. 이렇게 사실(fact)을 다룬 다큐드라마는 감독의 손을 거쳐 박진감 넘치는 스릴러로 반전한다. 네 번의 인터뷰는 곧 두 사람의 인생을 건 설전(舌戰)이다. 



“왜 그 테이프를 태우지 않으셨죠?” 

첫 번째 대담에서 프로스트가 야심 차게 날린 잽. 그러나 닉슨은 정치인이다. 오히려 이 질문을 유리하게 역전시킨다. 닉슨에게 계속 패하며 프로스트 팀은 패배를 예견한다. 글쎄, 프로스트에게 특별한 애정이 가진 않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를 응원하고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네 번째 인터뷰. 승리를 예견한 닉슨은 익숙한 음악인 ‘Victory at Sea’를 감상하며 아침을 맞이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증거를 들이민 프로스트의 기세에 닉슨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본심을 털어놓는다.  


대통령이 한다면,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정치적 죽음뿐. 닉슨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 순간, 우리는 프로스트와 함께 쾌재를 외친다. 아래 오른쪽 사진은 당시 백기를 든 닉슨의 클로즈업, 왼쪽은 그를 연기한 프랑크 랑겔라의 모습.



클로즈업의 축소력. 

눈앞의 화면은 보이는 것보다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배경은 축소하고 주제는 부각하는 미디어의 힘이다. 자기혐오와 패배감이 가득한 닉슨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프로스트는 승리한다. 닉슨이 이루어낸 모든 승리의 역사는 사라지고 그는 한순간에 정치 퇴물이 된다. 당시 <닉슨과의 대담>을 시청한 사람은 모두 4천5백만 명이었다. 이중 과연 닉슨 대통령의 정치적 신념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링 위에서 이젠 KO 당한 그 초라한 얼굴이 먼저 떠오를 테다. 당시 그를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리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워싱턴포스트마저 무너진 전직 대통령의 모습에 연민을 표했을 정도다.


미디어를 통해 정치를 그린 이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클로즈업의 축소력’을 비판한다. 우리는 두 시간에 걸쳐 <닉슨과의 대담>이 제작되는 과정을 지켜봤고 닉슨 대통령의 노련함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순간의 실수로 닉슨은 링 위의 패배자로 남게 됐다. 그 마지막 순간, 붓고 초췌한 얼굴로 남겨진 닉슨에게 난 언더독에게 느끼는 일종의 연민을 느꼈다. 영화는 닉슨 대통령의 사임 후부터 영원히 정계를 떠나기까지의 그 긴 여정을 두 시간으로 축소해 보여준다. 클로즈업의 축소력은 어쩌면 미디어와 정치가 가진 비극이 아닐까.





[정여진의 애프터쇼크]의 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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