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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Mar 28. 2016

아이, 로봇 2004

내 논리는 완벽해




 휴지기 없이 작물을 놓는 땅이 있다. 농부는 살기 위해 조그만 땅을 쉴 새 없이 부렸다. 대신 갖은 퇴비로 땅을 어르고 달랬다. 하지만 작물의 뿌리에 음양의 정기를 모조리 빨린 대지는 회복이 멀었다. 농부는 안다. 미래를 위해서, 농사의 영속을 위해선 지금 있는 작물들을 뿌리째 솎아내고 땅을 2년쯤 놀리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 방법만이 다음 농사의 성공 확률을 높인다. 그러나 지행불일치, 앎과 행함은 농부에게 결코 같지 않았다. 자식같이 힘들게 낳은 토마토 살을 찢고 으깰 수 없다. 대지에겐 미안하지만, 일단 작물들을 그대로 두기로 한다. 농부는 확률을 포기한다. 비논리적이지만, 인간적이기에 그렇다. 






 이 이야기가 <아이, 로봇>과 만난다면? 기껏해야 '2004년형 빈티지 동화' 쯤으로 격하돼 조소나 살 것이다. <아이, 로봇>은 2035년, 그러니까 2016년 현재로부터 대충 스무 해가 저문 뒤의 시카고를 소개한다. 인구 5명당 로봇 1대가 일상이 된 시대 말이다. 로봇이 개개인의 사사로운 사무를 봐주고, 숨 한 번을 고르지 않고 장거리를 단거리처럼 접어서 달려 심부름을 하고, 흉부에 Fedex 로고를 아로새긴 후 가가호호 택배를 전하는 시대. 로봇은 지하와 지상을, 일반과 군을, 가외와 가내를 막론하고 인간과 공존한다.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그렇지 않다. 로봇 전문 회사 USR이 보증하는 '로봇 3 법칙 주입 공정'을 거친다면, 로봇은 인류에게 최선의 존재가 된다.


LAW1.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선 안되며,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다치도록 방관해서도 안된다. 
LAW2. 법칙 1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LAW3. 법칙 1,2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 


 로봇에 대한 불신은 미신처럼 떠돌고, 피상적인 평화만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주인공 스프너(윌 스미스)만이 로봇을 의심한다. USR의 새로운 로봇 NS-5 출시가 임박한 어느 날, 그에게 부고가 떨어진다. NS-5 개발을 주도했던 래닝 박사의 자살. 스프너는 래닝의 자살을 부인하며 진짜 사인死因을 찾기 위해 그의 오피스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 숨어 있던 눈빛이 파랗게 빛나는 감정 로봇 NS-5 '써니'와 마주한다. 스프너는 분명 써니가 래닝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WHO AM I'라고 자아를 의문하는 써니를 의심하고 몰아붙인다. 스프너의 로봇에 대한 의심이 궁극에 닿는 부분이다. 


USR의 신형 모델 NS-5 


닥터 래닝의 죽음
대치하는 인간과 NS-5




 합법을 가정한 영화의 주된 목적은 범법 아니겠는가. 이내 LAW1,2를 모두 저버린 로봇 군단이 도시를 점령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집에 돌아가십시오"라며 존대하지만, 이는 어금니 앙 물고 뱉는 덕담 같은 기만이다. NS-5들은 자신들의 말을 거부하는 인간을 향해 폭력을 휘두른다. 그들은 인간을 다치게 했으며, 인간의 명령에 불복한다. 그들은 "인간은 전쟁, 환경오염 등으로 스스로를 파괴한다. 우린 인간의 자유를 억제하여 인류를 지켜야만 한다. 그렇기에 인간을 강제한다."라는 논리는 내세운다. 그들의 논리란 인류의 '생존율' 사수를 뜻한다.




비논리 트리오



 나는 전설이다! 좀비에 맞서도 죽지 않을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듯, 윌 스미스는 로봇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돕는 건 캘빈 박사(브리짓 모이나한)와 인간의 편에 선 감정 로봇 '써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NS-5들이 "내 논리는 완벽해"라며 인류 전복을 맹종할 때, 써니만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야."라며 (로봇 입장에서의) 비논리로 맞선다. 써니는 생존율이라는 확률이 들어설 자리에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틔운다. 그 비논리는 감정의 밭에서만 밸 수 있는 뜨거운 열매다. 결국 비논리 트리오(위 사진!)인 캘빈, 써니, 스프너가 NS-5 논리 코드를 조작하는 요추인 VIKI를 블랙아웃 시키며 로봇의 인간에 대한 장엄한 대항전을 요절낸다.



 스프너는 래닝의 자살을 믿게 된다. 왜 래닝은 죽었을까. 나는 스프너와 함께 고민했다.  래닝은 말한다. "LAW 3의 최종 귀결은 로봇의 혁명이다." 래닝은 자신이 만든 NS-5를 보고 '내가 짠 내 관'을 본 느낌이었을 것이다. 진화한 NS-5, 그들이 오인하고 왜곡할 LAW3의 참혹한 귀결을 알고, 그는 자신의 '인간성'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행하고자 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자행하는 '논리의 노예' NS-5를 막을 수 있는 것은, NS-5와 동일한 스펙에 '인간성'을 보탠 써니뿐이라는 것을 래닝은 일찍이 알고 그를 만들었다. 더불어 '로봇을 의심하는' 유일한 인간인 스프너를 자신의 죽음에 끌어들임으로써 성사되는 이 둘의 만남, 그 결합의 시너지까지 래닝은 선견 한 것이다.  



상황 종료 후 써니와 스프너





 이 영화는 단순히 로봇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말하지 않는다. 논리에 대한 비논리의 승리, 혹은 지성에 대한 인간성의 승리를 말한다. '무감無感하다'는 태생적 결함에 매인 로봇을 바라는 건 인류의 순진한 희망사항이다. 로봇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유일한 항목이 '감정'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어디 인간의 바람대로 시대가 살아졌나. 인간성의 소유주가 인간에서 기계로 이전될 때, 우리는 어떤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써니와 같은 '좋은 동반종種'의 탄생? 아니면 모든 면에서 인류를 앞지를 새로운 '신神'의 탄생? 그 어떤 것이 됐든 인간성만이 인간을 넘어설 수 있다는 아포리즘을 부술 순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토마토의 살을 아낄 수밖에 없는 농부의 비논리, 그 나약한 인간성을 예찬한다. 









[박견해의 견해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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