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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Apr 04. 2016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달걀의 저주'를 풀고자 한다면

 

 요즘 내가 그렇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후환이 두려워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한다.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둔

다. 마음의 병이 난다. 아쉬운 마음이 있지만 차마 그 마음을 상대에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 말로 인해 나와 그 사이에 거리감이 생길지 모를 일이다. 혼자 끙끙 앓는다.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남들이 보기에 혼자 전전긍긍해 하는 내 모습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타쿠미(우치야마 코우키)는 여전히 니토 나츠키를 좋아한다. 애정이 남아 있다.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자”는 마음 속 말을 니토 나츠키에게 던지고 싶다. 그렇지만 타쿠미는 자신의 속마음을 니토 나츠키에게 차마 드러내지 못한다. 그 말로 인해 둘 사이의 관계에 어두운 장막이 쳐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엉뚱하게도 니토 나츠키는 타쿠미가 나루세 준(미나세이노리)을 좋아해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라 착각한다. 마음 속 말을 담아두기는 니토 나츠키 역시 마찬가지다. 니토 나츠키는 ‘헤어짐’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타쿠미를 자신의 남자친구로 여긴다. 그럼에도 니토 나츠키는 자신의 속마음을 타쿠미에게 전하지 않는다. 타쿠미는 니토 나츠키에게 생겼다는 남자친구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지레 짐작한다. 


 마음 속 말을 전하지 못해 고통받는 가장 극적인 인물은 나루세 준이다. ‘수다’는 그녀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러브호텔’에서 아버지를 봤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로 인해 가정은 풍비박산났다. 죄책감에 나루세 준은 입을 꽁꽁 봉한다. 마음의 말을 바깥으로 내뱉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자신이 ‘달걀의 저주’에 걸렸다고 굳게 믿는다. 말을 하는 순간 복통이 몰려 온다고 거짓 호소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루세 준의 모습은 벙어리와 다름 아니다. 친구들은 그녀가 말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없다. 나루세 준이 타쿠미와 말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도 ‘입’이 아닌 ‘휴대폰’이다. 하고자 하는 말을 문자를 통해 전한다. 노래를 하면 마음을 전할수 있다는 발상에 착안해 소리에 ‘리듬’과 ‘박자’를 입히는 수고를 거듭한다. 



 불운한 저주다. 병이 났으면 치료해야 한다. 영화가 제시하는 처방은 의외로 간단하다. 기꺼이 마음을 열면 된다. 깨뜨리고자 노력하면 저주는 알아서 풀린다. ‘저주’로 보이는 ‘달걀’은 진짜 저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달걀’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달걀’은 스스로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 만들어낸 환상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마음의 말을 전하기에 앞서 지레 겁먹는다. 불운한 상황을 가정한다. 극단적인 미래를 보고서 이내 말하기를 관둔다. 영화 속 달걀은 마음 속 장막이 쳐지는 이 상황을 귀엽게 포장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가 만든 저주다. 타쿠미는 ‘저주’에 갇혀 끙끙 앓는 나루세 준을 보고 “처음부터 저주는 없었다.”고 얘기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려하는 자기 자신이 마음 속 말을 바깥으로 내뱉길 거부한다. 


  저주는 진짜 저주가 아니다. 영화가 찍는 방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마음의 말을 던지면 후환이 닥칠까 두려워한다. 내가 내뱉은 말로 관계가 소원해질까 끙끙 앓는다. 영화는 이 같은 가정이 애초부터 ‘무용함’을 설파한다. 의외로 마음 속 말을 내뱉는 일이 관계를 틜 수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타쿠미는 니토 나츠키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니토나츠키 역시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타쿠미에게 전한다. 결말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배드 엔딩이아니다. 둘은 오히려 가까워진다. 멋드러진 타쿠미의 고백에 니토 나츠키는 그 마음을 받아들일 의향을 드러낸다. 나루세 준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마음 속에 꽁꽁 담아두었던 말을 타쿠미에게 내뱉는다. 속사포처럼 던진다. 그렇지만 그녀가 우려했던 극단의 비극은 그녀의 삶을 덮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은 서로의 속마음을 알 기회를 얻는다. 관계는 한층 가까워진다. 



  달걀의 저주에 걸렸다. 내가 내뱉는 말로 누군가가 상처를 입을까 두렵다. 그것이 가져올 관계 악화가 무섭다. 우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다. 마음에 봉한다. 병을 얻는다. 영화가 그리는 ‘달걀’은 오글거리나 그것은 우리가 말을 않게 되는 배경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달걀'은 기만이다. 또 그것은 나약한 우리 자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세상에 저주는 없다. 저주를 풀고자 한다면 일단 마음의 외침에 응답해 보자. 마음이 외치고 싶을 땐 외치는 게 정답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거짓된 저주가 풀리는 순간은 이다지도 속시원하다.









[나슬기의 오층석탑]의 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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