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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Apr 08. 2016

독수리 에디 2016

볼품없어 보이는 그의 활공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







 썩 화려한 활공은 아니다. 에디(테런 에저튼)는 스키점프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높이 뛰는 선수는 많다. '플라잉 퀸'은 점프로 세계를 제패했다. 에디의 기록은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솔직히 형편없다. '기록'이라고 말하기도 우습다. 비웃음을 사기 딱 좋다. 그의 기록은 '우물 안 개구리' 딱 그 수준이다.




 그럼에도 에디의 활공에 주목하는 건 그것이 더 없이 아름다워서다. 나는 거기서 한 사람의 '노력'을 본다. 에디가 스키점프를 시작한 건 1년이 채 안 된다. 그는 다짜고짜 동계올림픽의 꿈을 갖고 점프대에 올랐다. 부상을 무릅쓰고 그 위에서 뛰어내린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포기할 법한 상황에서도 에디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착같이 물고 늘어진다. 에디가 보여주는 불굴의 노력은 그의 초라한 활공에 어떤 특별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를 두고 '위대하다'고 평가한다. 'The Great'. 어딘가 안 어울리는 듯한 수식어를 부여한 이유를 닉은 '지진계'에 빗대며 이렇게 설명한다. "개츠비는 민감한 감수성의 소유자다." 개츠비와 데이지의 사랑이 이뤄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개츠비는 그 속에서 0.01%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가능성을 발견한 뒤엔 그것을 이루고자 불굴의 노력을 발휘한다. 에디의 모습이 딱 이 개츠비의 모습과 비슷하다. 에디가 올림픽에 출전할 가능성은 솔직히 제로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에디는 그 속에서 0.01%의 가능성을 본다. 개츠비가 0.01%의 가능성에 매달렸듯 에디 역시 작은 가능성에 매달린 채 불굴의 노력을 발휘한다.




 처음엔 하계 올림픽이었다. 무릎을 다쳐 병상에 있던 중 올림픽 참가의 꿈을 품게 된다. 소질 없는 몸을 갖고 부단히도 애를 쓴다. 깨진 안경만 몇 개 된다. "소질없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도 에디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 다음이 스키다. 하계 올림픽보단 낫다. 상장이 꽤 된다. 올림픽 문턱의 근처까지 간다. 이번엔 '위원회'에 발목을 잡힌다. 혹독한 현실을 직면한 에디는 다시금 짐을 싼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체념할 만한 순간이다. 에디도 분명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한다. 바로 그 순간 에디의 민감한 감수성이 발휘된다. 스키점프에서 0.01%의 가능성을 본다. 기록만 세우면 스키 점프 선수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에디는 곧바로 '스키 점프 선수'가 되는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해외로 여정을 떠난다. 미약한 꿈의 가능성을 붙잡고 늘어지는 에디의 모습은 정말이지 개츠비와 겹친다. 그에게도 '위대하다'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개츠비의 일편단심 사랑이 아름답듯 에디의 활공을 향한 일편단심 노력 역시 굉장히 아름답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그의 활공은 우리에게 한 방 먹이는 바가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경쟁에 매몰됐다. 승리만 갈구한다. '노력하는 자'에 대한 기억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기기 위한 편법과 반칙만이 난무한다. 20대 공시생의 정부 청사 침입 사건이 끔찍한 것은 그 사건이 경쟁에 매몰된 우리 사회의 한 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승부'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 너머의 '승리'를 추종한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명백히 지금 시점의 '승부'란 개념은 왜곡되었다.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텡 남작은 말한다. "올림픽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닌 참가하는 데 있다." 지금 이 말을 믿는 사람은 머저리다. 이기지 않으면 의의가 없다. 이 사회가 '올림픽'을 논하며 거론하는 것도 오직 메달 순위뿐이다. 스포츠 뉴스는 우리나라가 몇 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는지 여념이 없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메달을 획득하지 못한 선수들은 철저히 스포트라이트 대상에서 제외된다. 박태환, 김연아 등이 인기를 얻을 수 있던 것도 그들이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사회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브론슨 피어리(휴 잭맨)의 말마따나 올림픽 참가에 의의를 둬선 사회의 웃음거리만 된다. 70m 스키점프를 성공하고 사회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에디에게 브론슨 피어리가 말한다. "내일이 되면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있을 테다." 메달을 획득하지 못한 선수들의 현실이 이렇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관심을 얻을 수 있는 시한은 하루살이의 생명 주기와도 같다.




 에디의 활공은 우리가 간직한 '승부'의 관념이 잘못되었다고 제대로 훈계한다. 에디는 말한다. 자신이 올림픽 참가의 꿈을 꾸게 된 이유는 "운동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에디가 90m 점프대에 오르는 이유는 하나다. 그는 자신이 웃음거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다. '참가하는 것 이상'에 의의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싶다. 실제 결과는 그렇게 된다. 저조한 성적임에도 누구보다 큰 환호성이 에디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취재진이 몰리는 것도 다름아닌 에디다. 에디의 활공은 '승리'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승부'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깨달음이 결부된 에디의 활공은 그 누구의 활공보다 푸르고 빛난다. 





 볼품없는 독수리다. 어느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렵하게 가르지 못한다. 썩 멋지지도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에디를 '독수리'라 호칭한다. 그 어떤 독수리보다 독수리답다는 듯 그를 환호한다. 에디가 마음 속 그릇된 '독수리'의 관념을 바로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에디의 활공은 진실된 독수리의 모습이 의외로 볼품없을지 모른다고 우리에게 알린다. 우리는 에디의 모습을 보며 볼품없는 데 어떤 아름다움이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에디를 통해 활공하는 독수리를 보았고, 볼품없는 독수리가 그 어떤 독수리보다 아름다울 수 있음을 발견했다. 승리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너무나도 앞만 보고 달려온 게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나슬기의 오층석탑]의 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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