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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Apr 08. 2016

정치 페티시

그치만, 호감 아닌 유감으로 인한 집착.



 시작은 <칠수와 만수>(1988, 박광수 감독)였다. 

영화는 서울의 과도기를 사는 두 남자 칠수와 만수를 조명한다. 두 남자는 옥수동의 낡은 고옥에 함께 산다. 둘은 그림을 그린다. 그렇다고 화가라는 고명한 직업을 제 것으로 하기엔 미진한 존재들이다.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 대신, 남이 청한 그림이나 그리는 딱한 존재들이다. 제 각기 물감이 눌어 붙은 파렛트와 마른 붓 같이 살던 그 둘은, 강남에 위치한 건물 옥상 광고탑에 위스키 광고를 그려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미국의 볕에 적당히 그을린, 자유의 향기를 타고난 체취처럼 풍기는 서양 여자의 반 나신을 걸어두고 그 둘은 광고탑의 철제를 밟고 그곳,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술도 좀 돌겠다, 들을 사람도 마땅찮겠다, 우리 둘만 있겠다, 그들은 지상에 납작 붙어 살 땐 차마 뱉을 엄두도 못 냈던 속엣말을 소리친다. 환호하는 듯도 하다. 시대는 소주에서 위스키로 흘러가는데, 어쩔 수 없이 소주가 당기는 시대착오적 입맛에 자괴를 느낀다. 그 둘의 짜릿한 '고공 일탈'은 곧 '고공농성'이 된다. 거리를 지나던 개개의 시민들은 한 덩어리로 뭉쳐 군중이 되고, 그들 모두는 광고탑 위의 위태로운 칠수와 만수에게 집중한다. 군중의 냄새엔 언론이 꼬인다. 이내 언론도 등장한다. 중계차도 동원된다. 경찰도 등장한다. 서장도 등장한다. 구조대도 등장한다. 그들은 칠수와 만수의 모습을 '노사 갈등에 기인한 한풀이 자살 소동'으로 규정한다. 그들은 노동자의 노도, 사용자의 사도, 임금의 임도, 체불의 체도 꺼낸 적이 없다. 손배가압류의 대상이 될 행위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선 곳이 '고공'이라는 점과, 그들이 '고성'을 지른다는 점과 그들의 행색이 추레하다는 점이 그들을 '불쌍한 노동자'로 추리했다. 정치 블릿(bullet)이 장전되기 좋은 조건이다.


칠수와 만수는 고공에서 허공으로 소리친다. "우리 그런(그렇게 심각하고 무거운) 것 아니에요!"
경찰과 언론은 회유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으면 안돼요! 내려와서 해결합시다!"

♪ 무엇이 변했나-김수철 



나는 이 부분에서 꽤 무거운 웃음이 났다. 아, 모든 것을 정치화시키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이구나. 정치화의 장점은 분명하다. 진단도 쉽고 치료도 쉽다. 대충 '정치 문제'로 버무리면, 그 강한 양념에 사람들은 수긍하게 되어 있다. 칠수와 만수는 '시대'를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에 붙은 딱지는 결국 '권리 쟁의'였다. 지나친 정치 집착, 집착, 집착. 나는 거기서 페티시 fetish를 떠올렸다.


영화 <칠수와 만수>


 정치도 페티시의 짝이 될 수 있나. 

페티시라고 하면 발과 발목, 그리고 그것을 적나라하게 둘러 안은 스타킹이 떠오른다. 사전적 정의는 집착, 이것은 종종 오인되어 '변태'라는 정신병리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내 얕고 옅은 지식수준에서 페티시는 이 정도의 수준이었다. 나는 페티시의 확실한 정의가 필요했다.



"페티시즘 fetishism은 그 자체로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운동, 이중의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페티시즘은 한편으론 어머니가 소유하고 있을 남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또 한편으론 그러한 믿음을 '없는 것으로'폐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중적으로 움직인다. "



 즉 페티시즘은 부정하지만 집착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책은 혁명을 예로 올린다. 우리는 혁명이 비추는 피비린내 나는 육체 전쟁이 끔찍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혁명이 갖는 윤리를 선망하며 은밀한 지지를 보내는 '심리적 가담'을 하게 된다. 그렇게 가담과 응원을 하면서도, 여전히 혁명의 폭력적 외형에 대해선 부정하게 된다. 이게 혁명에 대한 페티시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정치와 페티시즘도 이 줄기로 엮이지 않을까. 가장 순진한 해석으론 '정치 집착!', 책의 힘을 빌려 조금 더 교활하고 노련하게 들어가 보자면 정치를 의심하고 부인하면서도, 동시에 정치를 인정하고 정치에 강하게 흡인당하는 것. 나는 이것을 정치 페티시즘이라고 말해도 될까.



  절정은 2005년에 찍혔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모든 사회 문제의 원인은 그 세 글자로 회귀했다. "고스톱을 치다가 끗발 안 나오면 노무현 탓이란 소리를 하잖아요."의 인터뷰가 뉴스에 인용됐다. 화살을 쏘기에 가장 만만한 과녁이 대통령이고 정치인 것이다. 그리고 '이게 다 대통령 때문이다.'는 5년 주기 시즌제로 제목만 바꿔 달며 성업 중이다. 디스패치의 구구절절한 연애사 기록도 '정치판에서 지금 뭔가 숨기는 게 있다!' 한 마디에 복잡 다단한 정치 술수가 된다. 사람들은 낯설고 무섭고 불편한 사안을 만나면 정치를 찾았다. 정치는 마스터키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정치를 못 믿으면서도 집착한다. 정치가 만사의 입구이자 출구가 된 것이다. 




'왜' 냐는 질문이 빠졌다. 

왜 우리는 만사의 들입날출을 정치와 관련 지을까. 우리는 정치를 픽션과 논픽션을 통해 배웠다. 뉴스에선 정당의 차떼기 횡포와 정치인 비리 리스트를 말한다. 영화와 드라마에선 부패한 정치판과 정경유착을 묘사한다. 모사한다. 그리고 그런 영화는 천만을 줄넘기 줄 넘듯 넘긴다. 정치는 각종 권모와 술수에 통달해 어떤 일이든 일으킬 수 있는 전지전능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나라 전체를 덮을 만큼 큰 붕鵬이 날면, 국가 전역은 붕의 날개 아래에 놓인다. 우리 하늘을 덮고 있는 듯한 정치는 그렇게 상부에서 우리의 사사건건을 간섭하는 듯 느낀다. 그러니 운을 떼기가 무섭게 말 끝은 정치 차지가 된다. 



 실제 1980년대의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자 '3S(Screen, Sex, Sports) 정책'을 실시했다. 온 하늘이 3S로 덮혀, 높고 말간 창공은 가려져 있었다. 하늘을 가리는 천장이 된 3S 발판 삼아, 그 위에선 위선을 떨려는 노력도 않는 뻔뻔스런 정책들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미 '눈 가리고 아웅'하는 그 야트막한 정치 술수를 눈치챘다. 그래서 Sex의 곁 종목인 '스캔들'의 이면을 의심하는 것이다. 디스패치가 의심의 주역이 되는 것도 이리 보면 응당 그래, 싶다. 그 암흑의 뒷면에 숨어있을 정치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이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작년 말 공개한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가족과 지인은 각각 96%, 83% 신뢰하는 데 반해 국회 신뢰도는 15%인 것으로 조사됐다. (법원 35%, 검찰 34%, 정부부처 31%) 더불어 주요 기관의 공정성에 대한 인식은 국회가 20.8%(꼴찌...)인 것으로 나타났다. 쉽게 말해, 우리는 정치의 주체인 국회를 그냥 믿지 않는 것이다. 못하는 것이다. 



 정치 페티시즘의 윤곽이 나름 명확해짐을 느낀다. 사람들은 정치의 '공정과 합리'는 부인하지만, 정치의 막강한 '힘'은 인정하고 그에는 집착한다. 이 집착은 호감 아닌 유감, 회의감에 기인한 집착일 것이다. 그 둔중한 힘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정치에 뒤집어씌워 그 힘을 욕하고 싶은 것이다. 그 파워가 싫어서. '공명정대하지 못하면서 힘만 센 정치'가 정치 페티시를 만든 것 아닐까. 이슈가 되는 문제는 항상 부취를 풍기고, 우리의 알고리즘 속 부취는 정치로 출력되기 때문이다. 라면 너무 비약일까. 



 정치가 헤프게 인용된다. 길 가다 넘어지면 보도블록도 제대로 못 깐 정부 탓!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수 있다. 왜 '내 탓'만 하냐는 죽상은 보기 싫다. 정치가 고상한 지위를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은 신뢰 회복일 것이다. 신뢰 회복의 길은 맡은 바 임무에 충실, 공약 실천, 비리 척결쯤이 되려나. 결론이 참 뻔하게 샜다. 그런데 어쩌겠어. 이 뻔한 길도 어려워 건국 이래 내리 헤매는 이들이 있는데. 




참고       사유의 악보, 최정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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