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어화는 사실 어떤 것도 도둑맞지 않았다.
살리에르의 모습이 보인다. 살리에르는 잘 나가는 음악가다. 그러다 모차르트를 만나 고꾸라진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르게 있어 넘기 힘든 벽이다. 세상은 살리에르를 2인자 취급한다. 견고했던 살리에르의 아성은 무너진다. 살리에르는 모차르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느낀다. 질투한다. 결국에는 신을 향한 복수를 다짐한다.
정소율(한효주)은 기생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소리는 가슴에 맺혔다. 누구도 그녀의 재능을 의심하지 못한다. 추켜세운다. 그러다 서연희(천우희)를 반난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가수가 된 서연희를 마주한다. 이내 견고했던 정소율의 아성은 무너진다. 깊은 박탈감을 느낀다. 정소율은 서연희가 모든 걸 훔쳐갔다고 느낀다. 질투한다. 그러고는 비뚤어진다.
이해 못할 질투심은 아니다. 사랑도 잃고, 꿈도 잃었다. 정소율은 조선의 마음이 되고 싶었다. 그 꿈을 다름아닌 가장 친한 친구에게 빼앗긴다. 도로 되찾고자 발버둥쳐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건 자신의 '재능 부족'이다. 세상은 자기가 아닌 서연희여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한 인간의 관점에서 질투심이 솟구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서연희는 정소율의 사랑마저 앗아간다. 마음이 변치 않으리라던 김윤우(유연석)가 대뜸 서연희와 눈이 맞는다. 자신을 앞에 두고 키스한다. 정소율이 영화 내내 보이는 질투심은 결코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정서에 기댄다.
정말 서연희는 정소율의 모든 것을 훔쳐갔을까? 한 가지 상징을 본다. 정소율은 '옛 소리'를 상징한다. '유행가' 등 새 소리가 유입되지만 그녀는 옛 '정가'를 고집한다. 그녀는 그 시대의 마지막 '해어화'다. 이와 대조되는 인물인 서연희는 '새 소리'를 상징한다. 그녀가 부르는 건 '유행가'다. 그녀는 가시를 벗어 던진 해어화, 즉 '가수'다. 두 인물의 갈등은 옛 소리와 새 소리의 갈등이기도 하다. 소리가 충돌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정소율이 느끼는 '박탈감'은 기만이자 허구임이 드러난다.
오히려 필연적이었다. 정가를 부르는 한 정소율은 '조선의 마음'이 될 수 없었다. 해어화는 오직 한 사람에 의해서만 꺾일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정가는 조선 만인의 감정을 노래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것은 권력에 빌붙었다. 영화의 결말은 '해어화'가 조선 사람들에 의해 짓밟히는 장면으로 채워진다. 권력에 빌붙어 '소리'를 내는 정가에 사람들은 분노한 거다. 정가가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훔친다'는 말을 쓰기에 조선의 '옛 소리'는 애초부터 그 무엇도 소유한 적이 없었다.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는 자의 발버둥은 참으로 처절하다. 정소율은 붙든 것을 내어놓고 싶지 않다. 그녀는 서연희에게 말한다. "넌 나의 모든 걸 훔쳐갔어." 옛 소리가 새 소리에 전하는 처절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시들지 않으려는 해어화는 이다지도 굴욕적으로 저항한다. 한데 딱히 공감이 서지 않는다. 그런 눈물을 흘릴 만큼 조선의 옛 소리는 조선인의 마음을 달랜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해어화는 단 한 사람을 위해 피고 지는 꽃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그 꽃이 마음을 얻으려 삼는 대상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이인이었다. 정소율의 육체를 탐하는 건 김윤우가 아닌 무려 일본의 경무국장(박성웅)이다.
조선의 소리를 반성한다. 언젠가 '큰별쌤'은 이런 의문을 던진 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는 고려의 것이다. 고려시대의 직지심체요절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0년 정도 앞선다. 그런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세상을 변화시켰고, 직지심체요절은 그러하지 못했다. 왜 그럴까? 그만큼 우리 사회는 닫혀 있었다는 얘기다. 영화에 줄곧 나오는 '조선의 마음'이란 개념도 지극히 한정된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소리'는 있었을지언정 그 소리가 조선인의 마음을 진실로 달랜 적은 없다. 그 귀결이 시대의 외면임은 당연하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라들의 모습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원하는 좋은 사람 나타날 때까지 / 난 잠시 그녈 지켜줄 뿐이야." 더넛츠의 사랑의 바보. '해어화'는 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지 못해 짓밟힌 것이다. 정소율의 막판 절규는 절망적이나 딱히 지지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든다.
[나슬기의 오층석탑]의 연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