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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May 05. 2016

하나와 미소시루

나는 그녀의 행복에 동의할 수 없다.

 


그녀는 운이 좋다. 유방암에 걸렸다. 무려 20대의 일이다.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가던 중 싱고(타키토 켄이치)는 치에(히로스에 료코)의 몸을 더듬는다. 가슴에 손을 얹는다. 묵직한 이 촉감. 싱고는 치에에게 말한다. "가슴에서 뭔가가 만져지는데?" 치에의 가슴에 멍이 생겼다. 그것은 치에를 기나긴 투병 생활로 이끄는 암세포다.


 그녀는 운이 좋다. 치료했던 암이 재발한다. 싱고와 결혼한 치에는 아이를 갖는다. 순간, 갈등한다. 아이를 낳으면 암이 재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선뜻, 아이를 낳는다는 선택을 하기 어렵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가 말한다. "죽더라도 낳아라." 결국 치에는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꽃을 뜻하는 '하나'라 짓는다. 물론, 우려대로 암은 재발한다. 



 솔직히 기분 나빴다. 불운을 거듭 행운으로 가장해서다. 영화 내내 치에는 말한다. "나는 운이 좋습니다." 영화의 결말. 치에가 죽고 난 뒤 살아가는 하나와 싱고의 일상이 카메라에 담긴다. 카메라가 흔들린다. 치에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나는 정말 운이 좋습니다."


 내게는 영화가 행복에 이르는 그릇된 방식을 설파하는 듯했다. 영화는 속삭인다. "불운하다고? 더 암울한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해 봐. 그러면 네가 얼마나 행복한 줄 알게 될걸? 행복에 이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 치에는 이 방식에 충실하다. 치에는 불운한 와중에 극단의 불운을 가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불운을 '행운'이라고 정당화한다. 


 치에가 스스로 운이 좋다고 여기는 이유는 하나다. 바로 '하나'란 존재. 더 없이 소중한 존재다. 무엇보다 이 존재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치에의 치료를 담당했던 담당 의사는 말한다. "아이를 낳는 것만으로 모든 유방암 환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 많다. 치에는 역경을 딛고 아이를 갖는 데 성공했다. 치에는 하나를 보며 늘 되새긴다. "나는 정말 운이 좋습니다."



 합리화는 끝내 만족하는 돼지를 양산한다. 내가 영화가 제시하는 행복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던 이유다. 치에 본인이 '행복'에 취하긴 했다. 하지만 그런 만족감이 그녀가 처한 현실까지 바꾼 건 아니다. 암세포는 여전히 활동했다. 그것은 커져 결국엔 그녀의 온몸에 퍼진다. 가장된 행복은 본인이 본인이 진짜 행복을 거머쥘 기회를 차단한다. 그릇된 테두리를 설정해 불운을 행복인양 만족하며 살아가도록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마따나 "만족하는 사람"과 "불만족하는 소크라테스"가 있다면 치에는 전형적으로 전자에 해당한다. 


  그러고 보면, 치에는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떠올리게 한다. 사토리. 득도한 세대다. 이들은 기회의 벽이 차단되었음을 안다. 이들은 애초부터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음으로써 불행의 여지를 차단한다. 즉, 행복해지고자 현실의 불운을 잊는 것이다. 사토리 세대는 불운을 행운으로 가장해 자신들의 현실을 자위한다. 불운한 현실에 직면하고도 "나는 운이 좋다"고 되뇌는 치에는 한 명의 사토리 세대와 다름 아니다. 치에의 화사한 미소가 마냥 기분 좋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녀의 얼굴에 사토리 세대의 서글픈 자화상이 깊게 서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가 미소시루를 끓인다. 외양이 참 먹음직스럽다. 냄새가 풀풀 코끝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아이가 미소시루를 만드는 풍경이 흐뭇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차마 그 맛에 입을 대지는 못하겠다. '미소시루'가 무엇을 합리화하는지 알기에. 그것은 행복에 이르는 그릇된 방식이다. 내가 봤을 때 치에는 불운할 뿐이지 결코 행운 있는 삶을 산 여성은 아니다. 공전기가 돌듯 "나는 운이 좋습니다." 이 말이 머리 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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