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스 Jun 30. 2024

그러면 속이 시원하니?

 



 “야~ 그 인간은 말이야. 그게 문제야!”

  이 인간은 또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불과 몇 분 전에도 2시간 넘게 누군가를 씹었으면서도 또 할 말이 남았나 보다. 몰래 테이블 아래서 시계를 바라본다. 집에 가고 싶다! 빨리 이 술자리가 끝났으면 좋겠다! 닥터 스트레인지라면 타임스톤을 꺼내 시간을 조정했을 텐데..     



  많은 모임, 혹은 대부분의 회식은 늘 그렇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술만 들어가면 꼭 누군가가 안주가 되어 잘근잘근 씹힌다. 가깝게는 동료부터 넓게는 연예인들 혹은 정치인들까지... 자질과 능력으로부터 시작한 평가는 자연스레 그놈의 인성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누군가의 입과 입을 통해 살이 붙여진 이야기는 어느 순간 그놈(?)을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악당으로 만들어버린다.

 ‘어쩜 그렇게 숭악할 수가 있지?’ 듣는 것만으로도 오싹오싹 소름이 돋는다.


  “네 생각은 어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왜 말을 안 해?”

  듣다 보면 꼭 내게도 시선이 집중된다. 어쩌지? 저 눈빛들 좀 봐! 동조 안 하면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기인데... 입술을 계속 오물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다.  

 “음... 그게 말이에요~”

  그런 모임을 마치고 집에 갈 때면 이상하게 힘이 든다. 버스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은 5살은 더 늙어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시간이 빨리 흐르는 만남이 있다. 2시간 만난 것 같은데 알고 보니 4시간이나 훌쩍 지났고, 하루 종일 조잘거려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헤어지기가 무섭게 또 만나자고 연락하고 싶고, ‘오후 네 시에 네가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어린 왕자의 한 구절처럼 그 사람 만나러 가는 길은 저절로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오늘은 무슨 말을 하지?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아니 굳이 말 많이 안 해도 된다. 듣고만 있어도 아니 보고만 있어도 마냥 좋으니까.

문득 궁금했다. 같은 만남인데 왜 사람마다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네 무의식은 너한테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사람과 빼앗아 가는 사람을 단박에 알아본단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잠’에 나온 한 구절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에너지를 만드는 공장이다. 타고난 에너지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학습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고유의 에너지를 축적해 나간다. 그리고 누군가와 만나면 눈빛, 표정, 그리고 구사하는 어휘나 문장, 에티켓을 통해서 우리만의 에너지를 상대방과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이때 서로가 내뿜는 에너지가 비슷할 수도, 전혀 다른 색을 낼 수도 있다. 색깔이 다른 건 상관이 없다. 설령 보색이어도 합쳐질 수만 있다면 조화로운 색이 될 수 있으니.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경우는 누군가에게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려는 자들이다. 

 “이것 좀 믿어봐~” “너 투표 누구 했어?”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생각이 비슷하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끊임없이 강요한다. 누구나 다양한 생각을 하며 살고 또 가치관이 다를 수도 있는데 그들은 좀처럼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기 안의 세계에 갇혀서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 분명 세상의 모든 것은 그렇게 딱 반으로 나눠 떨어지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확신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제일 말이 많다.      


  두 번째 케이스는 남을 함부로 험담하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불행이 자기 행복인지~ 아니면 남을 까내려가면 자기가 올라가는 거라 착각하는 건지 그렇게 매사에 불평불만일 수 없다. 그런 사람들과 같이 이야기하다 보면 급한 일이 있어도 자리 비우기가 쉽지 않다. 내가 사라지면 또 얼마나 내 험담을 해댈까? 안 봐도 눈에 선하다.      


  마지막은 끝도 없이 우울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잿빛 시야로 세상을 바라본다. 물론 사람이 살면서 마냥 행복할 수 없다는 건 잘 안다. 당연히 누군가 아플 때는 옆에 있어주고 힘들 때는 힘이 되어줘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게 습관인 사람들이다.

 ‘그게 되겠어?’ ‘그게 말이 돼?’ ‘힘들 것 같아.’

 타고난 본성인지 아니면 학습된 건지, 그들의 결핍과 투정을 계속 듣고 있노라면 한숨은 전염되고 눈물은 동조화된다. 금세 기분이 울적해지고 자신감까지 사라진다.      



  예전에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그저 누군가와 오래 사귀면 무조건 친구라고 생각했다. 에너지를 주든 뺏어가든 상관없다 생각했다. 세월이 빚은 우정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믿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모든 사람과 다 잘 지내려는 건 너무 나이브한 생각이었구나!’


  비즈니스 미팅이면 어쩔 수 없지만 사적인 만남까지 굳이 내 에너지를 뺏어가는 사람 만날 필요가 있을까? 요즘은 그런 의구심이 많이 든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생각보다 후유증이 오래 남으니까. 그러다 보니 습관적으로 남 험담하는 사람, 가치관을 세일즈 하는 사람, 우울하고 힘든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는 사람과는 점점 거리를 두게 된다.      






  예전에 현재 업계 탑인 연출 선배 밑에서 조연출 한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하는 내내 너무 호되게 당해서 (매번 눈물 쏙 빠지게 혼났다) 좋은 기억이 있지는 않지만, 그의 아래에 있으면서 하나 배운 게  있다면, 그건 자신의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법이었다.



  그는 쓸데없는 말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촬영 현장에서도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연기자 한 분이 취해서 그런지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험담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순간 심각해졌고 다른 사람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눈치 보고 있을 때 옆에 앉은 선배는 그저 술만 홀짝홀짝 마셨다.

  “이건 너무 하잖아요. 안 그래요? 감독님!!”

  하지만...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어도 선배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번 비슷한 이야기가 맴돌자 그는 가방을 들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를 잡아드리러 뒤따라가는 내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힘든 세상에 굳이 듣기 싫은 이야기 계속 들어야 하나?”  


  특유의 시니컬한 성격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컨디션을 남에게 맡기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어렵게 지키고 있는 내 에너지를 왜 남이 가져가야 해?’

  그렇게 시위하듯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누군가를 험담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불만이 있으면 당사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했지 비겁하게 뒤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생산적인 다른 일 하나 더 하겠다! 가 그의 모토였다.      


  한 번은 촬영하다가 너무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어서 선배한테 이렇게 토로한 적 있다.

  “아니 그 사람 너무 양아치 아니에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동조를 바라며 그렇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시니컬한 반응이었다.

  “너 나 믿어?”

  “네?”

  “내가 네가 한 이야기 그 사람한테 할지 안 할지 어떻게 알아?”

  그러면서 그는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내려 보았다. 그때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디 가서 누구 험담하지 마. 그게 돌고 돌아서 너한테 다시 돌아가니까!”     

  정말 그의 말대로였다. 의미 없이 꺼낸 말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확대 재생산되었고, 그게 또 돌고 돌아서 결국 내 평판이 되고 말았다. 뒷담화는 곧 앞담화가 되었고, 누군가를 향한 손가락질은 이내 내게 쏜 화살이 . 그때 깨달았다.



  ‘말이 많으면 꼭 실수를 하게 되는구나!’


  그리고 결심했다. 웬만하면 남의 안 좋은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말자고. 그리고 습관처럼 남 씹어대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지 말자고. 그게 그에게 배운 크나큰 교훈이었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에너지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 온다. 행운과 불운은 늘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한테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사람과 빼앗아 가는 사람을 단박에 알아보니까.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이 모인다!’     


  내 곁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을 두고 싶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좋은 에너지를 나눠주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싶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거니까. 에너지를 소중히 여기고 또 누군가에게 잘 전달할 수 있다면 그 에너지는 돌고 돌아 결국 환한 불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      



(FIN)    



사진 출처: PIXABAY











작가의 이전글 아빠의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