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논의 역설’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나? 워낙 유명한 명제여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거북이가 먼저 출발하면 아킬레우스(달리기 챔피언)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거다. 왜냐? 아킬레우스가 100m 가는 동안 거북이는 10m 앞서 가고, 다시 아킬레우스가 10m를 나아가면 거북이는 1m 이동하여 그 자리에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킬레우스가 다시 1m를 가면 거북이는 0.1m 나아간다. 따라서 아킬레우스는 아주 미세한 거리만큼 뒤처지게 되며, 이는 아무리 가까워져도 거북이를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거북이와 아킬레우스
현실에서 거북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신생아 아니면 누구든지 가볍게 제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제논의 주장이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는 걸 알면서 그의 논리에 1도 반박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수학으로는 논리의 허점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들은 ‘제논의 논리’에 '역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너 이거 다시 써야겠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은 내 글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백일장 대회에 학교 대표로 출전했는데 우편으로 보내기 전에 그의 검수를 받아야 했다.
“거기서 상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 심사위원들이 원하는 글을 써야지 이렇게 네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절대 상 못 받는다고? 알겠어?”
선생님은 검지로 내 이마를 톡톡 치셨다.
“모레까지 다시 써와~ 알겠지?”
“네.” 나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나름 열심히 쓴 글인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 봐야 하나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학교 백일장 대회에서 입상했네. 교무실 밖으로 나오는데 마음이 천근만근 납덩이 단 것만 같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글을 좋아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읽었다. 특히 소설을 너무 좋아했다. 집에 아빠가 거금을 주고 산 세계 문학 전집이 있었는데, 공부를 별로 안 좋아했던 나는 아빠 서재에서 하루 종일 책만 읽었다. 처음 읽은 건 디킨즈였고 그다음에는 빅토르 위고, 셰익스피어 전집, 조금 머리가 커지면서 김동인과 다자이 오사무의 탐미주의에 빠져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글 쓰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방송반 활동을 하며 시답지 않은 소설도 썼고 각종 글짓기 대회 나가서 운 좋게 상도 몇 번 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제일 못했던 과목은 바로 ‘국어’였다. 다른 과목은 나쁘지 않았는데 ‘국어’ 성적은 딱 평균 정도밖에 안되었다. 특히 수능 언어영역은 형편없었다. 아무리 해도 성적이 안 나왔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와중에 선생님은 날 교무실로 부르셨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생각해보면 이랬다. 언어영역 지문을 읽다 보면 ‘공감각적 심상’, ‘역설’, ‘형상화’ 등 이런 걸 묻는 문제가 많았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같은데 정답은 늘 하나였다. ‘소리 없는 아우성’, ‘찬란한 슬픔의 봄’이 왜 ‘역설’ 밖에 안 되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게다가 더 어이없는 건 짤막한 문단 몇 개 주고 이 글을 통해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거다. 사람에 따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수백 가지인데, 수학 문제도 아닌데 정답이 있다는 건 도무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정말 작가의 의도일까? 출제자 개인의 의도 아니야?’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송강 정철에게 물어보고 싶었고 만해 한용운에게 정말 ‘님의 침묵’을 그런 의도로 쓰신 건지 따져보고 싶었다. 몇몇 평론가가 논문을 통해 자기 뇌피셜로 적은 것이 정설인 양 학계에 널리 퍼지고, 어떻게든 문제를 변별력 있게 만들어야 하는 출제자는 그게 유일한 정답인냥 학생들을 세뇌시킨다. 해석의 다양성은 금기시된다. 조금 다른 접근방식은 오답 혹은 이단일 뿐이다.
결국 선생님의 요구사항에 맞춰 나는 수차례 내 글을 고쳤다. 원고지에는 빨간 밑줄과 X자가 덕지덕지 묻어있었고, 나중에는 답답하셨는지 그는 직접 문장을 쓰셨다. 그렇게 더 이상 내 글이 아닌 글을 전국 백일장 대회에 제출했고, 나는 장려상을 탈 수 있었다.
상장에 적힌 내 이름이 사전에서 처음 보는 단어처럼 떫게 느껴졌다.
무한히 가까워지기만 할 뿐 도달은 못하는 거 아닙니까?
무한한 시간이 지나도 결승전에 도달 못하겠죠?
제논의 역설은 직관적으로는 부정할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반론이 불가능했다. 누가 봐도 궤변인데 논파는 어려웠다. 그로부터 2천 년 후, 뉴튼은 ‘무한급수’라는 개념을 도입해 이를 설명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수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조각난 종이를 계속 오려 붙여 보세요. 그러면 한없이 종이에 가까워질망정 종이 한 장은 결코 완성할 수 없습니다. 우주가 끝날 때까지 계속 붙여도 조그마한 조각 하나 정도는 남을 것 아닙니까?”
이런 난제는 200년 더 흘러 ‘칸토어’라는 수학자에 의해 완전히 해결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셀 수 있는 수의 체계와 셀 수 없는 수의 체계를 분리해서 봐야 한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의 말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길이’는 셀 수 없는 수에 속하니 길이를 셀 수 있는 수로 취급한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선에는 수많은 점들이 있는데 그 점들은 애당초 셀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흐르는 물에 물방울이 몇 개인지 셀 수 있나?
언제부터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선분이란 건 자연수랑 전혀 다른 개념인데 우리가 그걸 혼용해서 쓴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 의미로 제논의 역설은 애초에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기에 논리로 분석하는 것 또한 불가능 한 것이다.
인생에도 셀 수 있는 수가 있고 셀 수 없는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 성별, 인종, 세대, 정치성향 등등은 후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서로를 나누고 또 거기에 가치관을 주입하고 있다.
MZ세대는 이기적이다.
이대남들의 정신상태가 궁금하다!
무슬림들은 과격하다!
좌파들은 어떻고 우파들은 또 어떻다더라!
한국 여자들은 이래서 안 되고 한국 남자는 저래서 안 돼!
안 그래도 좁은 나라인데 이렇게 계속 쪼개지고 또 극단적으로 나뉜다는 건 참 신기할 따름이다.
마치 조선 시대 붕당 정치의 재림 같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또 거기서 남인, 북인 그리고 노론 소론으로 갈라지듯 우리도 이익 혹은 이념에 따라서 계속 세포분열을 한다. 한쪽 편에 선 사람은 자신이 신봉하는 집단을 위해 맹목적으로 충성을 다한다. 상대편을 폄하하고 그들의 가치를 훼손하고 또 자신들의 주장을 앞세우기 위해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한다. 그걸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게 정말 세상의 흐름일까? 출제자 개인의 의도 아니야?’
더 어이없는 건 수많은 집단들은 단편적인 사례 몇 개 던져주고 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거다. 사람에 따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수백 가지인데, 수학 문제도 아닌데 정답이 있다는 건 도무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도 어찌 보면 ‘제논의 역설’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셀 수 있는 수의 체계와 셀 수 없는 수의 체계를 분리해서 봐야 하는데, 굳이 쪼개지 않아도 되는 것을 쪼개 놓고 그걸 논리적으로 분석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으로 가르면 싸우게 된다. 너와 내가 갈라지는 순간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나뉘어서 좋게 끝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점점 더 불편해지고 불필요한 오해를 하게 되고 선입견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마음에 벽이 생기는 순간부터 우리는 ‘제논의 역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연속적 무한이 아니라 이산적 무한으로 착각을 하고 얼토당토않은 논리에 빠져 서로의 감정만 다치게 만든다.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자체에 있다. 첫 줄부터 막 줄까지 작가가 만든 세계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과 만나고 또 교감하면서 우리는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공감각적 심상’, ‘역설’, ‘형상화’ 등등 굳이 나눌 필요 없는 것을 나누고 디테일한 것에 집착하는 순간, 좋은 책 한 권 읽고 덮었을 때의 그 감동과 희열은 결코 느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