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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스 Jan 28. 2022

그 많은 걸 다 먹으려고?

 

  예전에 아내랑 이마트 트레이더스에 갔을 때 일이다.

  늘 그렇듯 나는 봇짐장수가 되어서 아내 뒤를 줄레줄레 따라갔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허생원은 품삯이라도 받지 나는 아무리 카트를 밀어도 땡전 한 푼 떨어지는 게 없다. 예전에는 카트에 넣는 100원이라도 몰래 챙길 수 있는데 요즘에는 그런 것도 없다. 속상하다. 암튼 하나둘씩 쌓여가는 카트를 밀면서 청도 우시장 소처럼 음메음메~ 울다 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 코너가 나온다.  


 ‘와~ 대박!!’

 속으로 유레카를 외친다. 석류가 무려 30%나 세일 중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맛있는 석류가 지천에 깔렸으니. 누가 내게 만약 내일 세상이 종말 한다면 뭘 하겠냐고 물으면, 당당히 한 그루의 ‘석류나무’를 심겠노라고 답하리라~ (알고 보면 스피노자도 나처럼 그저 사과를 좋아했던 게 아닐까?)  



  행사 카드를 확인한 다음 아내를 부르려고 하는데 뒤 돌아보니 이 사람은 어디 가고 없다. 이상하다. 분명 좀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카트를 밀고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패딩 입은 아내가 레몬 한 봉지를 들고 있었다.

 ‘사려고 하나? 저 많은 걸. 한 봉지에 족히 20개는 들어있는데~’

 장난기 많은 나는 그녀에게 빠짝 다가갔다.


 “그 많은 걸 다 먹으려고? 돼지야!

 

  냉소가 섞인 말투로 짓궂게 말했다. 아내랑 나는 늘 그렇게 서로 장난치곤 했으니까. (참고로 아내는 른 체형다) 순간 멈칫한 그녀가 천천히 내게 고개를 돌리는데...


  이런... 아내가 아니네.


 처음 보는 여자분이었다. 그녀는 눈을 치켜뜬 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때 정말 시간이 얼어붙는다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앗.. 죄송해요.”

  너무 당황해서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알고 보니 아내는 이미 다른 코너로 간 후였다. 아내는 내 이야기를 듣고 깔깔 웃었다.

  “왜 그랬어?”

  “그러게 말이야.” 빨개진 볼에 두 손을 올리며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분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저 맛있어 보여서 레몬 한 봉지 집었을 뿐인데... 이상한 놈이 와서  '돼지'냐고 시비 걸었으니까. 아마 별 미친놈 다 있겠다 싶었을 게다. 실은 그 분이 조금만 늦게 고개를 돌렸다면  '보기만 해도 신물난다!' 라고 드립칠 뻔 했다. 진짜 레몬으로 싸다구 안 맞은 게 다행일지도...

  암튼 다시 한번 그분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 전한다. 근데 정말 억울한 게 뒤에서 보면 누가 봐도 아내였다. 키도 비슷했고 머리스타일, 패딩 메이커까지 똑같았으니.  

    

  살다 보면 이런 식으로 실수를 할 때가 많다. 나처럼 헷갈려서 실수하기도 하고, 의도치 않은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수도 있다. 실수를 안 한 사람이 있을까? 적게 하든 많이 하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 4대 성인들도 제자들에게 소싯적에 자기가 했던 실수를 이야기하면서 껄껄 웃었을 게다.   

    

   또 썰 하나 더 풀자면 9년 전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일이다.

  형과 나는 침통한 채로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처음 상주가 되어서일까? 안 그래도 마음이 미어지는데 절차는 또 왜 이리 복잡한지, 절하랴 손님 맞으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거의 못 자 병든 화초처럼 시름시름 앓아갈 때 회사 동기 형이 나타났다. 고맙더라. 바쁜 와중에 이렇게 찾아줘서.


 근데... 빈소에 들어온 형의 얼굴이 왠지 불안해 보였다. 뭐랄까? 이런 곳을 처음 와본 사람처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 그래도 동기 사이에서 순박한 걸로 유명한 형인데...

 “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순간 형이 외국에서 오래 살았나 싶었다. 아니. 뭐. 익숙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제단 위에 국화꽃 올리거나 향초를 태우면 돼요.” 나는 그렇게 속삭였다.

 그러자 이해했다는 듯 형은 단지에서 국화꽃 하나 빼더니 제단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 모습을 엄숙하게 지켜보며 맞절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순간 이상한 냄새가 나서 올려다보니 글쎄..

동기 형이 국화꽃을 향에 대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형 그게...”

  고개를 절레절레 돌리자 동기 형은 뒤늦게 그게 아니란 걸 알고 국화꽃을 꺼내 입으로 호호 불었다. 반쯤 타다만 국화꽃이 손에 닿았는지 저글링 하던 형은 “아! 뜨거워~”하면서 저도 모르게 제단으로 던져버렸다.

 헉!!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정말 미쳐버리겠더라.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고... 친형과 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질끈 씹은 채 흐느끼듯이 웃음을 참았다. 진짜 고문이 따로 없었다.

  ‘아빠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웃긴 건 어쩔 수 없잖아요.’




 

  동기 형은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말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형에게 고마웠다. 근 일주일 만에 웃은 건 처음이었으니까. 먹구름이 가득하고 빗방울이 첨벙거리던 구멍 난 가슴에 작은 빛줄기 하나 내려온 것 같았으니까.

  그 사건 이후, 나와 친형은 생기를 되찾았다. 잠깐 웃었을 뿐인데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사람 마음이란 게 생각보다 더 얄팍하더라. 이래서 힘들 때 사람들이 예능을 보는 건가! 싶기도 했고.      






  요즘 느끼는 게 코로나 시국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할 때도 ‘내가 혹시 말실수하는 건 아니지?’ 계속 확인하게 되고, 그 많은 코미디 프로도 어느 순간부터 재미를 잃어버렸다. 이제는 누가 실수라도 하면 집단 린치는 기본, 아무 관련 없는 흑역사까지 방출되어버리니까 다들 알아서 몸 사리는 느낌이다.


  가끔 누워서 잠을 청할 때 옛날 내가 했던 실수들을 생각해본다. 예전에는 ‘그때 왜 그랬을까?’ 생각하며 이불을 걷어찼다면 요즘은 ‘에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간담이 서늘할 때가 많다. 만약 그때 레몬 아주머니가 고소라도 했다면 나는 유치장에 갇힌 채 취객들이 풍기는 술 냄새 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조심해야 하는 건 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으니.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눈치 보며 살아야 하나 생각하면 그저 답답할 뿐이다.     


  너무 큰 실수만 아니면 한 번 용서해줘도 되지 않을까?

  그러지 마~라고 하며 그냥 한번 웃어주면 안 될까?

  누구나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실수가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니까.      


  가끔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산책하고 싶을 때가 있다. 시답지도 않은 이야기에 껄껄 웃으며 핀잔을 주거나 썰렁한 농담으로 맞받아치는,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가 많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오솔길을 내어줄 준비가 되었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가끔 누군가 지친 사람이 와서 앉아 쉴 수 있는 자리, 따뜻한 햇살이 닿는 곳에 작은 등나무 의자 하나 갖다 놓고, 혹여 누가 실수로 꽃 한 송이 꺾을지라도 살랑이는 바람으로 나그네의 땀방울을 말려주는. . .

 그런 오솔길이 되고 싶다.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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