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토스카나 I

사랑의 시작

by 진원재 Willie Chin




2008년 1월 자정, 로마에 도착했다. 바로 버스로 갈아타고 피렌체로 향했다. 피렌체와 밀라노에 행사가 있어 출장차 방문하는 것이었다. 계속되는 터널들. 산맥을 지나고 있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탈리아 반도에는 구릉, 언덕이 많다. 그리고 온화한 날씨와 따스한 햇볕. 덕분에 포도가 잘 자랄 수 있었다.


새벽 한가운데 피렌체에 도착했다. 꼴딱 밤을 새우고 아침에 행사장으로 향했다. 몸은 무거웠으나 마음은 설레었다. 사실 야근과 술에 찌들어 있던 나는 이번 이탈리아 출장을 너무도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는 대학 때 배낭여행으로 간 적이 있었으나 피렌체와 밀라노는 처음이었다. 나는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먹기 위해 일한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이 '아무거나 먹자.', '점심 가까운데 가자.'이다. 이런 나였기에 좋아하는 스파게티와 피자를 맘껏 먹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래서 출장 때 해야 할 일과 보고서를 모두 미리 마쳐놓고 온 터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오전에 행사장을 대충 돌아보고 잽싸게 밖으로 나왔다. 피렌체의 메인 기차역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건물이 보였다. 점심시간 즈음으로 사람들이 분주히 식당을 찾아 걸어 다녔고, 나도 허기를 들고 사람들과 같이 걷고 있었다. 어둑하고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자그마한 식당들이 모여있는 골목이 있었다.

구수하고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꽤 있는 소시지와 빵을 파는 식당에 들어갔다. 웨이터가 손가락으로 하나 표시를 하며 “우노?”라고 묻는다. “예스”라고 대답했더니 잠시 후 빵 사이에 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한입 물었는데.. 대박! 너무 맛있었다. ‘이게 뭐지??’ 빵을 벌려보았다. 살코기가 아니고 소 내장 같았다. 둥근 빵에 소 내장을 보다니 의외였다. 원래 곱창에 소주를 좋아하던 나는 기대하지도 않은 풍부한 소 내장 풍미에 너무 놀랐다. 나중에 물어보니 람프레도토(Lampredotto)라는 피렌체식 곱창버거란다. 내가 먹어본 빵 사이 음식(햄버거, 샌드위치, 핫도그와 같은) 중 람프레도토 보다 맛있는 걸 아직 찾지 못했다. 하얀 빵속에 스며든 곱창국물향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때 먹은 것이 내 인생 유일한 람프레도토다.


곱창버거의 존맛탱 충격을 받아 멍한 상태로 피렌체 대성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노란색 건물들 골목 사이로 점차 드러나는 대성당의 거대한 지붕과 하얀 건물로 인해 '사진으로만 보던 피렌체에 진짜 왔구나.' 깨닫게 되었다. 무엇인지 모를 원초적인 힘이 내 몸을 이끌고 있었다. 지구를 도는 달처럼 성당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지붕은 어마어마했고 계속 멍한 상태에서 지붕 속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지점에서 가까이 볼 수 있는 지붕 안쪽 벽화는 정신없고 약간 무서웠다. 힘들어 괴로워지려고 할 때쯤 좁고 어두운 계단이 나왔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은 차고 앞은 보이지 않고. 머리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쓰러질 것 같아 바닥에 손을 대려고 할 때 빛이 보였다.

피렌체 두오모 지붕 꼭대기. 그곳엔 천국이 있었다. 따뜻한 갈노란색의 피렌체가 아래에 깔리고, 푸르른 하늘이 위에 펼쳐졌다. 360도로 나의 눈과 몸을 감쌌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울컥하면서 눈이 시렸다. 옆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붕 위 한 바퀴를 돌았다. 다 돌 때까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피렌체 풍경을 잽싸게 눈에 넣고, 차분하려고 차분하려고 애쓰면서 겨우 아래로 내려왔다. 다 내려와 알아챘다. 사진 한 장 제대로 못 찍었다는 것을.


저녁 숙소에 들어가기 전 아주 조그만 식당에서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먹었다. 크림이 들어가지 않은 진짜 까르보나라. 그리고 같이 나온 하우스 와인. 와인은 유리컵에 한가득 따라 주었다. 내가 알고 있는 와인잔이 아니었다. 뚱뚱하고 오래된 유리컵이었다. 이 것이 사랑의 시작이었다. 이탈리아 허름한 분식점 같은 곳에서 마신 투박하지만 정이 넘치는 와인. 정체모를 그 와인에 사실 처음엔 '이거 먹으면 머리 깨지는 거 아냐?'라는 의심을 했던 것 같다.

파스타 속 계란과 파르마지오 레쟈노 치즈의 풍미는 내가 경험한 짭짤과 느끼함의 극치였다. 그런데 새콤한 붉은 와인이 느끼함을 완전히 잡아주었다. 그 집 와인은 경쾌한 신맛이 강했고, 체리향이 조그만 식당 안을 가득히 메웠다. 이 하우스 와인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너무도 궁금했지만 종업원은 영어를 못하는 것 같았고, 나도 용기 내어 물어보지 못했다. 정신없이 파스타와 와인을 느꼈다. 우아한 와인잔에 살짝 따라주는 위선이 아닌 진솔함이 온전히 느껴지는 시골 아줌마 같은 와인이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와인의 향기가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취기가 아닌 기억 때문에 느껴지는 기분 좋음이었다. 아! 이래서 와인을 마시는구나. 시차가 안 맞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잠이 밀려왔다. 내일도 꼭 와인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꼭 무슨 와인인지 물어봐야지.' 다짐하며 잠에 들었다.



*** 이때 마신 와인은 산지오베제 sangiovese 포도로 만든 키안티 Chianti 와인이다. 토스카나에서 마신 와인은 모두 키안티 와인이었다. 나의 와린이 시절 메인 탐구 와인이었다.

보통 와린이(와인초보)로 시작하면 진하고 탄닌이 강인한 칠레, 미국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상큼 발랄한 이탈리아 와인으로 시작했다. 값비싼 와인도 좋지만 쉽게 편안히 마실 수 있는 와인을 더 좋아한다. 내가 접했던 와인 중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와인들을 에피소드 마지막에 소개하고자 한다. 철저히 개취이니, 꼭 참고만 해야 한다. 와인의 세계는 우주만큼 복잡하고 우리의 입맛 또한 그만큼 복잡하니까.


와이너리) Antinori

와인명) Villa Antinori Rosso

포도) 산지오베제

색) 진한 루비

향) 검은 과일향, 오크향, 가죽향

맛) (5점 만점)

진하기 2.5

탄닌 2.5

당도 0.5 (드라이 4.5)

산도 3.0

가격) 2~3만원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탈리아 와인에 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