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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 II

산지오베제

by 진원재 Willie Chin




행사장에서 빠르게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피렌체까지 와서 일에 시달리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바로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엄청난 조각들과 그림들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기원전 그리스 조각품부터 중세의 보티첼리 비너스까지 엄청난 작품들이 눈앞에 쏟아졌다.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가 얼마나 많은 재력과 관심을 갖고 예술을 대하였는지 잘 느낄 수 있었다. 미술관 밖으로 나와 바로 옆 광장에 있는 다비드 상도 보고 베끼오 다리와 아르노 강도 거닐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오며 어마어마한 것들이 무뎌질 때쯤, 우피치 미술관 옆 손님들이 꽤 있는 작은 식당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시는 해외의 맛집 평점 같은 것은 보기 어려웠다. 식당 안팎의 사람 수가 오프라인 별점이었다.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를 보니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라는 T본 스테이크가 있어 주문하고 하우스 와인 한잔을 추가로 시켰다. 웨이터가 이것저것 묻는데 잘 알아듣기 힘들어 오케이만 했던 것 같다.


여전히 잔은 투박했으나 그래도 스템(와인잔 아래 손잡이 부분)이 있는 와인잔에 정이 넘치듯 가득 따라주었다. 색은 맑고 투명한 루비빛이었다. 딸이 어렸을 적 가지고 놀던 가짜 보석에서 보았던 붉은색이었다. 안 마셔봐도 어제 까르보나라와 같이 먹었던 그 와인이라는 게 느껴졌다.


와 스테이크는 정말 미쳤다. 이놈의 피렌체는 먹는 거마다 감동이다. 주방에서 고기를 굽고 투박한 크기로 잘라서 나왔는데 속은 생고기였고 겉은 바삭하게 타있었다. 와인과 고기가 컬러와 향이 이상하리만큼 잘 어울렸다. 순간적으로 육식동물이 된 나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와인의 신맛이 고기 느끼함을 잡아주고, 고기의 육즙이 와인의 알콜기를 잡아줬다. 밥 한술 입에 넣고 된장찌개 한 숟갈 떠서 먹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걸 마리아주라고 하는구나.' 와인에서 체리와 같은 붉은 과일향과 가죽향, 동물피향 같은 것들이 가득했는데, 고기 풍미와 고소한 냄새에 너무나도 잘 어우러졌다.


와인을 홀짝 거리다 남은 고기의 양과 맞추는 걸 실패했다. 와인 한잔을 더 시켰다. 추가 주문을 하면서 이 와인에 대해 모르고 가면 된다는 죄의식을 느꼈다. 웨이터에게 와인잔을 들며 "왓츠 디스?"라고 하니, "산죠베제!"라고 말했다. 바로 수첩에 한글로 썼다.


'산죠베제'


다음 날은 호텔에서 출발하는 '하프 데이 버스 투어'를 신청했다. 피사로 가는 관광코스였다. 피사의 사탑을 보기 위해서 버스에 올랐다. 피사로 가는 토스카나의 시골은 평화로웠다. 낮은 구릉과 간간히 보이는 사이프러스 나무들과 집 그리고 시골길. 한 시간 넘게 걸려 피사에 도착했다. 피사 대학, 갈릴레오 갈릴레이 공부, 피사의 사탑을 둘러보고 피사 광장으로 갔다. 어딜 가나 메디치 가문의 문양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멋진 도시국가를 만들고 이끌 수 있었던 메디치가의 리더십과 재력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광장 옆 피자집의 냄새 때문에 온통 머릿속에는 피자로 가득 차 버렸다.


1시간의 자유시간.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 피자집으로 갔다. 마르게리타를 시켰다. 그리고 와인 한잔을 시켰다.


“산죠베제, 플리즈”


10분 만에 나온 것 같다. 화덕에서 나온 피자는 도우와 토마토, 모짜렐라, 올리브유 각종 재료의 향기가 마구 쏟아졌다. 여기에 같이 나온 와인 한 모금. 역시 빨간 과일향과 강렬한 신맛 그리고 역시 피 냄새. 육류와도 잘 어울렸지만, 밀가루와 토마토, 모짜렐라치즈와도 너무 잘 어울리는 와인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코와 혀는 피자와 와인의 농락에 정신없이 벌름, 날름 거리고 있었다. 기분 좋게 정신없이 먹고 마시고 버스에 늦을 까 봐 서둘러 가이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피렌체로 오는 버스에서 생각했다. ‘도대체 이 동네는 멀까? 음식이면 음식, 예술이면 예술, 과학이면 과학 일류 분야가 너무 많다. 무엇이 이렇게 만든 걸까? 메디치가의 마지막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베키오궁 광장에 있는 노천카페에서 카푸치노 한잔을 마셨다. 카페 테이블에 앉으니 추가 요금을 냈던 것 같다. 아.. 이 카푸치노는 또 머냐? 향의 세기와 파워 자체가 다르다. 아주 복합적이고 풍부한 커피향과 함께 크림, 계피까지 내 몸으로 쏟아진다.


카푸치노에 한참 빠져있을 때, 옆 테이블 멋진 할아버지가 이탈리아 억양의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산죠베제가 너무 맛있다고 하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우피치 미술관 청소부라고 했다. (사실 클리너라고 했는데, 청소부인지 미술품 관리 전문가인지는 정확히 알아듣진 못했다.) 일을 마치면 항상 수트를 입고 퇴근하면서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를 마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 로마제국이 왜 번성했는지에 대해 말하는데, 로마가 점령하면 점령지에 와인을 풀고 이탈리아 수다를 떨고 즐겁게 같이 노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할아버지는 지구 역사상 로마시대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시기였다고 자신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 즐거운 수다와 노래, 따스한 햇빛. 점령을 당한 게 아니고 점령을 원했을 거다. 문명, 정권의 변화? 이 딴 게 아니라 그냥 즐겼을 것 같다. 나도 토스카나의 산죠베제를 알아버렸다. 그리고 나도 행복 쇼크를 받았다. 호르몬의 변화가 온 게 분명하다. 연애시절 때 느꼈던 분명 그 감정과 흡사했다.



토스카나의 대표 포도 이름이 정확하게 산지오베제 sangiovese라는 것을 출장 다녀와서 알게 되었다. 이 포도로 만든 적포도주는 중간 정도의 진하기와 탄닌(떫음), 알코올(14도)을 갖고 있고, 신맛이 강한 편이다.

체리와 같은 붉은 과일 혹은 검은 과일, 발사믹식초, 허브 향이 난다. 나는 동물의 피가 연상되는 향을 느끼는데 그런 정보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 병을 오픈하고 10분 정도 지나면 부드러워지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이렇게 거의 바로 먹을 수 있는 와인을 '뽕따'라고 하기도 한다. 신맛이 강해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신맛을 너무 좋아한다. 단맛, 짠맛, 기름진 맛은 너무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매운맛, 쓴맛과는 상극이다. 경쾌한 신맛의 산지오베제 와인은 육류, 밀가루 음식들과 함께 즐기면 최고다. 밥과 된장찌개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Santa Cristina

Toscana

산지오베제

루비색

붉은 과일향, 검은 과일향, 오크향

진하기 2.5

탄닌 2.5

당도 0.5

산도 3.5

2~3만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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