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야근,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살다 간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집에 갈 힘이 없어 회사에서 잠들기도 했다. 모든 게 싫어졌다. 회사도 집도 친구도 다 싫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냥 혼자가 되고 싶었다. 몸이든 마음이든 모든 게 끝도 없이 추락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바닥이 필요했다. 이 추락을 멈출 수 있는 바닥.
이런 심각한 상태를 알아챈 직장 동료가 와인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만사가 싫었는데, 이상하게 그날은 일을 제쳐두고 식당을 향해 출발했다. 지친 몸이 와인을 불렀다. 지친 머리가 이탈리아를 부르고 있었다. 진짜 위로가 필요했다. 와인 리스트를 보자마자 주저 없이 정했다. 항상 궁금했던 BDM,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한 병에 18만원. 10만원 이상의 와인은 마셔본 적이 없었다.
'그래 마시자!'
산지오베제 포도의 클론(변종)은 아주 많은데 그중에 몬탈치노 마을에서 키우는 산지오베제를 '부르넬로'라고 한다. 이것으로 만든 와인을 몬탈치노의 부르넬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인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Brunello di Montalcino라고 하며, 줄여서 BD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코르크 마개를 따자마자 퍼지는 검붉은 과일과 나무 향기
콜라에 맑은 피를 탄듯한 오묘한 컬러
부드럽지만 또 강렬한 탄닌과 신맛
그리고 BDM은 여운이 확실히 길었다. 보통 5초 정도 향과 맛의 여운이 느껴지면 피니쉬가 길다고 하는데 BDM은 상당히 오래갔다. 한 10초 정도로 느낀 듯하다. 그리고 아주 복합적이다. 무슨 향인지 구별하기 힘든 여러 가지 것들이 느껴진다. 그리고 또 신기한 것은 계속해서 변한다. 과일향과 같은 새콤달콤한 향이 우세하다가 나무, 낙엽 같은 느낌이 밀려오고, 꽃시장 들어갈 때 냄새가 나기도 한다. 확실히 키안티 와인보다는 복잡하고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시간 지나니 느껴지는 돌냄새와 같은 미네랄 느낌
어릴 적 가족들과 물놀이 갔던 한탄강의 자갈돌 냄새였다.
두 시간을 넘으니 더 부드러워진다.
어머니 장롱 안에 걸려있던 실크 머플러 느낌
어릴 적 기억들이 생각난다.
나는 어린 시절, 눈치를 많이 보는 아주 소심한 아이였다. 나의 모든 신경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어떻게 생각할까에 쏠려있었다. 그런 강박에서 빨리 벗어나려면 성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면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왠 걸. 주변 사람들에게 쏟아붓던 나의 에너지는 온전히 회사 일에 쏟아붓고 있었다.
오히려 그때가 더 행복했었다. 목이 아프면 어머니가 마이신 약과 부드러운 실크 머플러를 목에 감아주셨고, 여름방학이면 어김없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물놀이를 가주셨다. 힘들었다고 생각했던 날들도 모두 멋진 추억이 되었다.
'지금의 힘듦도 모두 추억이 되지 않을까?'
'힘들어 죽고 싶은 시간들도 인생 에너지를 제일 많이 쓴 추억으로 멋지게 남지 않을까?' '그래. 모든 나의 시간은 추억이 된다!'
Talenti
Brunello di Montalcino
산지오베제
옅은 가넷색
오크향, 광물향, 가죽향, 과일향
진하기 3 (실크 느낌)
탄닌 3.
당도 0.5
산도 4
10만원대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보다 아래 등급의 와인이 로쏘 디 몬탈치노(RDM)이다. BDM은 숙성기간이 오래 걸리는데 와이너리에서 BDM급으로 만들기 힘들겠다는 판단을 하거나 좀 더 제조기간을 빠르게(생산비용을 저렴하게) 가져가야 할 경우 RDM으로 출시한다. 가격은 BDM의 반값 이하이다. 나는 사실 BDM보다는 RDM을 더 좋아한다. BDM은 복합미와 고급스러움은 뛰어나나 개인적으로 과실향과 상큼함을 더 좋아해서 RDM이 더 좋다. 지갑 문제도 있다. 우아하고 중후한 백작 부인을 만나고 싶다면 BDM을, 고귀한 집안의 상큼 발랄한 셋째 딸과 이야기하고 싶다면 RDM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