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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II

카타라토

by 진원재 Willie Chin



엄청나게 무더운 여름날이면 항상 마시는 와인이 있다.


돈나푸가타 안씰리아 Donnafugata Anthilia


너무 더워서 잠 못 이루는 밤, 창문 밖 귀뚜라미 소리를 안주 삼아 한두 잔 들이키면 커다란 해변이 나타난다. 바다 위 구름이 가득하고 파도와 바람이 몰아친다. 작은 빗방울도 흩날린다. 저 멀리 바다를 보며 걸어오는 한 여자가 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머릿결이 더욱 바람에 흩날린다.


내 앞에 선 순간, 그녀의 볼 옆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불어오는 바다, 넘실리는 바람을 느낀다.


얼굴색은 어둡지만 모든 걸 차분히 받아들이는 편안한 모습. 우리가 느끼는 편안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고 힘들어도 자신에게서 슬픔과 괴로움을 차단하며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편안便安함은 평안平安함이 된다.


돈나푸가타는 이탈리아어로 ‘도망친 여인’ 이란 뜻이다. 19세기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의 아내이자 단두대에서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언니인 마리아 카롤리나가 나폴레옹의 군대를 피해 시칠리아섬으로 피난 온 것에서 와이너리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 멋진 와이너리는 시칠리아 토착 품종으로 다양한 와인을 만들어낸다. 아주 진하고 강한 와인부터 아주 라이트하고 여린 와인까지. 누구든 자신에게 맞는 돈나푸가타 스타일을 찾을 수 있다. 돈나푸가타 와인을 접하면 왠지 모를 친숙함과 친밀감이 생기고, 그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이는 아름답고 쉬운 라벨과 고퀄의 와인이 조화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나푸가타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그것을 사랑하게 되며 어느 순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어버린다.


안씰리아가 집에 없는데 여름은 다가오고 와인샵에서도 보이지 않을 때는 초조해진다. 뉴질랜드 쇼비뇽블랑을 대체제로 사서 마셔보지만 절대 바닷가의 그녀를 만날 수 없다. 가끔 꿈에도 나타난다. 지난겨울 와인샵에 있을 때 사둘 걸. 나는 오늘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마트 와인코너로 카트를 밀며 들어간다.



Donnafugata

Anthilia

카타라토 안쏘니카

아주연한노랑색

레몬향, 자몽향, 복숭아향

진하기 2.5

산도 2.5

당도. 1.0

2만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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