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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III

에트나 로쏘

by 진원재 Willie Chin




와인을 마신 지 10여 년이 넘어가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신의 물방울’에서처럼 꽃밭에서 나비가 날아오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계곡에 있는 듯한 환상을 경험하려면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은 프랑스 부르고뉴 피노누아를 마시는 것이다. 와인 여행의 마지막 종착역은 부르고뉴 피노누아라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었다.


여리여리 맑고 붉은 컬러, 여러 가지 과일과 꽃밭, 그 무지막지한 향과 질감에 취해 곯아떨어져서 아침에 자고 일어나도 그 향기와 느낌이 남아 있는 와인. 어떠한 지역도 품종도 따라올 수 없는 고귀한 부르고뉴 피노누아 포도는 키우기가 까다로워 생산량도 적고 가격도 높다. 가장 싼 지역급 와인도 5~8만원부터이고, 마을급은 10만원 이상, 등급(프리미에, 그랑) 와인은 몇십, 몇백, 몇천만원까지 올라간다.


비싸고 접하기 어려운 만큼, 한번 제대로 경험하면 절대 잊을 수 없고 눈에 아른거리는 부르고뉴 피노누아. 그러나 이 도도한 와인을 잊게 해 준 이탈리아 와인이 있다. 바로 시칠리아의 에트나 로쏘 Etna Rosso이다. 에트나 화산 지역에서 자라는 네렐로 마스칼레제라는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부르고뉴 중에서도 비교적 강렬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쥬브레 샹베르땡과 아주 유사한 이 와인은 진한 듯 여린 맑은 루비색을 띤다. 붉은 과일향, 강렬한 꽃향과 각종 허브 향기가 만발하는 와인이다. 아주 라이트한 진하기를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풍성한 맛과 향을 지니고 있다. 처음 마셨을 때, 750미리짜리 향수병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순박한 시칠리아섬 처녀와 같은 와인에게서 우아함이 용암처럼 뿜어져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기쁨이었다. 기대도 안 했는데 그 기쁨은 완전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고산지대의 서늘한 기온과 높은 고도의 강렬한 태양, 그리고 물을 듬뿍 머금을 수 있는 화산재의 땅이 어우러져 불화산에서 피어오른 꽃 같은 와인이 되었다.


에트나 로쏘의 등급은 이탈리아 최고 등급인 DOCG의 아래인 DOC다. 말도 안 된다. 어쭙잖은 피에몬테의 DOCG 와인보다 에트나 로쏘가 훨씬 더 매력적이고 고품질이다. 이걸 보면 이탈리아 등급체계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부르고뉴 피노누아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라는 것도 도저히 설명이 안된다. 불란서 명품 맞춤복은 이태리에선 기성복 수준이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말도 안 되는 이탈리아 화산섬 와인은 안타깝게도 국내에서 구하기가 그리 쉽진 않다. 그러나 와인 아웃렛과 같이 와인 종류가 아주 많은 매장에 가면 구석에 수줍은 듯 아주 소량이 누워 있다. 제발 부탁이니 꼭 죽기 전에 만나보기 바란다.



Le Vigne di eli

Etna Rosso

네렐로 마스칼레제

연하고 맑은 루비색

붉은과일향, 미네랄향, 흰꽃향

진하기 2.0

산도 3.0

탄닌. 2.5

당도. 0.5

3~4만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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