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와인이 늘었다. 와인 마시는 양도 늘고, 와인을 사는 양도 늘었다. 오늘 마시고 싶은 와인을 골랐다. 네로 디 트로이아 Nero di Troia. 처음 마셔보는 종류의 와인이다. 오후 4시경 오픈해서 큰 와인잔에 반 정도 따른 다음, 남은 병은 빨리 코르크를 막고 냉장고에 넣었다. 와인잔에 코를 대 향을 맡고 살짝 입술에 머금은 다음 첫맛을 음미했다.
과일향, 나무향이 났지만, 처음부터 훅 다가오진 않았다. 아직 알코올기가 쌨고 향은 밋밋했다. 이럴 땐 식탁에 잘 모셔두고 샤워를 하거나 딴짓을 하는 편이 낫다.
한두 시간 지나, '아! 맞다. 와인 따라놨지!' 하며 식탁으로 다시 갔다. 다시 마셔보니 알코올 기운은 사라지고 부드러워져 있는 산미와 떫기가 느껴졌다. 그러면서 퍼지는 과일향과 다양한 냄새들. 나무, 가죽, 허브, 흙 등 여러 가지 느낌이 생겨났다. 아직도 강한 듯하여 와인을 조금 더 채우고 한두 시간을 더 내버려 둔다.
더 부드러워져 있다. 맑은 물로 수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와인잔 가장자리는 투명도가 더 올라가고 예쁜 보라 컬러만큼 향과 맛은 최고로 아름다워진다. 온몸이 찌릿해진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코로나지만 이렇게 집에서 와인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복이다. 행복해진다.
“에잇 술 냄새! 또 와인 마셨어?”
부엌에 물 마시러 들어온 둘째가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핀잔을 준다. 그러면서도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나의 얼굴을 보며, 그냥 잘해보라는 투의 표정으로 물을 가지고 자릴 피해 준다.
행복은 티가 난다. 세상은 코로나로 어수선하고 사람들은 답답하게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만, 와인 때문에 행복해졌다. 좋은 와인과의 만남은 더욱 그렇다. 마스크에 가려져 미소가 보이진 않겠지만 난 더없이 표정이 좋아졌다.
네로 디 트로이아는 이탈리아 완전 깡시골 와인이다. 주변에서는커녕 매체를 통해서도 이탈리아 풀리아를 다녀왔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이 깡시골의 주민들은 네로 디 트로이아 와인만큼은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나도 이 와인에 감동받고 행복해지면서 이들의 자존심이 괜한 것은 아님을 느낀다.
이탈리아 깡시골 와인 한 모금이 주는 즐거움에 코로나의 종말을 기원하며, 죽기 전 반드시 풀리아에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잠자리를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