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확실히 과일 캐릭터 와인을 선호한다. 이 와인들은 검고 붉은 여러 가지 과일향을 뿜으며, 마시는 사람에게 생기를 돋게 해 준다. 그들은 진지하거나 노잼과는 거리가 멀다. 상큼 발랄한 생과일이나 달콤 쨈과 같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그들의 최종 미션은 사람들의 콧구멍과 혀, 눈을 자극하여 신경을 통해 뇌를 점령하는 것이다. 즐거움과 행복감을 높여 본인들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과일형 와인이 더 좋아진다. 떼루아니 빈티지니 이런 지식과 정보도 이젠 귀찮다. 아주 바람직한 변화다. 와린이 시절, 와인은 있는 그대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마셔야 한다고 배운 내가 그동안 잃었던 기본을 다시 찾고 있다.
이제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가슴으로 마실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와인을 만났다. 이 녀석은 과일향 보다도 허브, 초코, 쌉쌀 후추향과 같이 진중하면서도 다채로운 향기를 보여주었다.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이 와인의 이름은 네그로아마로 Negroamaro.
이러한 향기들은 다른 포도들의 케이스에선 2차향기들(오크 숙성에서 나오는)인데 네그로아마로는 포도 차체에서 과일류와는 다른 여러 가지 자연의 향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듯했다. 진지하고 강한 내성적인 사내아이 느낌과 같은 매력을 풍겼다.
네그로아마로는 강했다. 오픈해놓고 공기와 접촉시키는 병브리딩이 필수였다. 병브리딩은 그냥 코르크만 따두면 안 된다. 공기와 닿는 면적이 넓어야 한다. 충분히 첫 잔으로 빼놓은 다음 1~2시간 오픈해 둔다. 마셔보았더니 그래도 안 풀린듯하여 다시 놓아둔다. 부드러워지지 않았는데 다 마셔버리면 절대 안 된다. 더 멋진 와인을 위해 인내는 필수다.
강한 와인의 저력은 몇 시간 뒤 묵직한 부드러움으로 나타난다. 인내 뒤에 따라오는 한줄기 성취감처럼 내 가슴은 뭉클해졌다.
'이런 와인도 있구나.'
자연을, 세상을 느끼게 해주는 와인이었다. 마실 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복잡한 세상, 다양한 와인들. 감각으로만 와인을 접하다가 생각에 빠지게 하는 와인을 만났다.
네그로아마로는 이탈리아 장화 반도 뒷굽 끝 지역 와인이다. 진짜 진짜 깡촌 와인이다. 지난번 소개한 네로 트로이아 보다 더 깡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자, 엘리트 동네인 이탈리아 중북부의 과일형 와인과는 다르게 여러 가지 자연 향미로 사람들의 이성을 흔든다. 세상은 복잡하고 다양하다고 속삭였다. '와인의 세계는 끝이 없구나.' 또 한 번 겸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