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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토 I

아마로네

by 진원재 Willie Chin




나의 부모님 세대의 대세는 검소함이었다. 내 아이들 세대는 소확행이 대세다. 나는 중간에 꼈다. 혈기 왕성할 땐 욕망을 참으며 부모님께 검소함을 배웠다. 나이 먹고는 나의 아이에게 검소에 '검'자만 꺼냈는데, 아빤 왜 그렇게 찌질하냐고 인생 즐기라고 되려 잔소릴 듣는다.


2000년 21세기를 시작하며 엔트로피란 책을 읽었다. 에너지에 관한 책이었는데, 너무나 쇼킹했고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의 양은 한정되어 있으며, 쓸모 있는 에너지에서 쓸모없는 에너지로 한쪽 방향으로만 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에너지가 계속해서 고갈됨을 의미했다. 쌀이 밥은 되는데, 밥은 다시 쌀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우리 후세를 위해 아끼며 살아야 한다는 책이었다.


인류를 위해 나도 동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년 뒤 첫아이가 태어나면서 더욱 검소 의지를 불태웠다. 나의 아이가 또 그 아이의 아이가 좋은 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아껴야겠다고 다짐하고 행동했다. 쓰레기 분리수거도 병적으로 했던 것 같다. 돈도 아껴 쓰고 먹고 싶은 것도 꾸욱 참았다. 가성비 이탈리아 와인 한 병 사서 일주일 동안 홀짝홀짝 한잔씩 나눠마시는 것이 나의 유일한 사치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인류애를 가지고 살아왔는데.. 그냥 자린고비가 아닌 엔트로피를 읽은 독자로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아껴왔는데.. 지금 난 그냥 꼰대가 되어있었다. 아들놈도 이젠 어른이 되었다. 인류애?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지금을 즐기라고 나에게 얘기한다.


이렇게 허탈한 날, 하필 눈에 띄는 와인이 있었다. 아마로네 델라 발포리첼라 Amarone della Valpolicella

그냥 아마로네라고도 불리는 이 와인은 ‘아파시멘토’라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와인은 당도가 알코올로 변해 술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포도의 당도가 높아야 제대로 된 술(높은 알코올)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지역 사람들은 멀쩡한 포도를 말려 응축된 높은 당도를 만들어 와인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이것이 아파시멘토 방식이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렇게까지 포도의 육즙과 부피와 시간을 날려 가며 와인을 만들어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건 분명 중세부터 돈이 많았던 베네치아 사람들의 사치와 낭비가 만들어낸 호사물이었을 거라 느꼈다. 베네토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베네치아와 베로나는 부자동네였으니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로네를 마셔볼 기회가 생겼다.


'미쳤네. 미친 와인이네.'


엄청나게 진한 와인이었다. 색과 밀도가 너무도 진해서 검붉은 우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향기도 진했다. 온갖 진득한 과일들이 머리를 조여올 정도의 향이었다. 맛에서도 달콤함이 묵직하고 크게 다가왔다. 이건 그냥 거대한 과일쨈초코릿이었다. 초콜릿 장인이 만든 예술품이었다. 이건 제조가 아닌 예술이었다.


아마로네를 처음 마시고 아파시멘토에 대한 나의 생각도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엔트로피, 효율 이런 것도 다 부질없었다. ‘오래 살아 뭐하려고? 아껴야겠다는 강박 속에 행복 없이 스트레스받으며 오래 살아 뭐하려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끼기도 하면서 예술을 한다는 건 욕심이다. 둘 중에 하나를 정해야 한다.’


생각이 많아졌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혼란스러웠다. 베네치아에 가 보진 않았지만, 어지러울 것만 같았다. 보기만 해도 미로 같은 도시, 복잡하게 얽혀있는 운하, 다양한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아마로네는 나를 혼란 속에 빠뜨려 지금까지의 나를 부정하고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주의 법칙이란 없다. 에너지의 흐름도, 에너지의 총량도 다 부질없다. 복잡한 세상 안에 나 자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사라질 것이다. 저 병에 담겨 있는 아마로네처럼.




Masi

Costasera Amarone Classico

코르비나, 론디넬라, 코르비노네

진한 검붉은색

초콜릿향, 검붉은과일향, 오크향

진하기 5.0

산도 1.5

탄닌 1.5

당도 2.5

5~7만원대


아마로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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