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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 노튼 Apr 02. 2019

고통과 공생하다

내면의 결함을 대하는 방법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말이지만, 나는 친구 간의 아주 끈끈한 의리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여태껏 내가 속한 단체나 그룹에서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심지어 가족에 대한 소속감도 크지 않다. 그래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혼의 친구를 찾아다니며 외로워했다.


 흔히들 엄마라고 하는 존재는 나의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존재로 여겨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헌신적인 엄마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것이 없다. 츤데레와 같은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엄마를 좋아하려고 노력을 해오고는 있지만 나에겐 여전히 힘든 일이다.


 엄마는 나에게 든든한 우군이 아니었다. 독선적이었으며, 나의 약점을 공격 거리로 삼았고, 공감해줄 상대를 찾는 나를 오히려 비난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엄마와 대화를 하기 전에 먼저 상처 받지 않을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도 엄마가 밉다고 말하기는 싫다. 부모에게 상처 받지 않은 아이란 있을 수 없고, 애초에 완벽한 부모란 존재할 수 없으니까. 단지 내 외로움의 시작점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요즘은 도무지 시답잖은 농담이나 일상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어렵다. 2년 전만 해도 내겐 손쉬운 일이었는데 말이다. 머릿속엔 온통 내가 삶과 예술에서 깨달은 진리의 파편들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조금은 두려운 감정이 든다. 얕은 생각만 말하는 이 사람에게 금방 유치함을 느끼고 또 외로워질까 봐. 고등학교 시절엔 대학에 가면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똑같이 시시했고, 사람들은 내가 몇 년 전에나 했던 고민을 이제야 시작하고 있었다.


 얼마 전 친구의 생일파티가 있었다. 몇 년 만에 보는 대학 동기들을 만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셨다. 하지만 술에 취해 떠드는 와중에도 묘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전과 같은 농담을 하고 같은 웃음을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본 나는 어색한 말투와 불편한 웃음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웃는 얼굴로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오는 길은 미칠 듯이 외로웠다.




 정말 오랜만에 아빠와 치맥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와는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이긴 하지만 경상도 남자들의 특성이랄까, 낯간지러운 이야기는 웬만해선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날만큼은 술의 힘을 빌어 나의 고민에 대해 말했다. 아빠. 도대체가 세상엔 왜 이렇게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어요. 왜 사람들은 내가 깨달은 진리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며 사고를 확장시켜주기보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와 같은 영양가 없는 회색분자 같은 소리만 하나요. 엄마로부터 시작된 나의 외로움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어요.


 아빠는 자신도 젊었을 적 나와 비슷한 외로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놀라웠다. 사실 이게 다 유전자의 장난질이었던 것인가? ㅋㅋ 나는 이렇게 된 게 다 아빠 때문이라며 인생 선배로서 여태껏 알아낸 해결책을 알려달라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빠는 도올 김용옥 아저씨 이야기를 해줬다.


 “김용옥은 젊었을 때부터 관절염이 있어 매일 바늘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달고 살았대. 그런 병이 있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저주하기도 했지만 사도 바울에 대해 공부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 바울도 김용옥처럼 ‘몸을 가시로 찌르는 듯한 질병’을 평생 달고 살아서 매일 밤 신에게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 했는데, 신은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났다.”라고 답했대. 그 이후로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오히려 가시 덕분에 교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대. 김용옥은 그걸 보면서 고통과 ‘공생’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 주어진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함께’ 살아야 돼. 너와 생각이 맞는 사람이나 집단을 만나는 때가 올 거야. 아빠는 30대가 돼서야 그걸 찾았다.”


고통과 공생하는 법


 아빠는 ‘너는 너만의 답을 찾을 거야’라는 따뜻한 말도 빼놓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라는 소설 내용이 떠올랐다. 수억 년 동안 지구에 살아온 개미들은 암을 치료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사람들은 개미들에게 그 치료법을 묻는다. 그 치료법은 암과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어렸을 땐 그 숨은 의미를 전혀 알 길이 없었지만 비로소 이해가 됐다.


 맞다. 이것은 전혀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축복이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내면의 커다란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의 결점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들은 것이 오히려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게 했다. 바울의 불치병처럼 나의 병은 아마 죽을 때까지 치유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외로움과 대화하며 공생하는 법을 안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성장을 이룬 것인가.


 상대를 이길 수 없다면 그와 친구가 되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 말을 강자에게 빌붙어 살으라는 말로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내면의 결함을 두고 그 말을 하지 않았나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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