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윌 노튼 Apr 25. 2020

눈치 게임

넌 이래서 귀여워


애매한 남녀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명분입니다. 서로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일종의 배려하고 할 수 있지요.


저는 민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늘 술자리 있는데 너도 올래? 저번에 말했던 애 있지? 재밌다는 애. 병철이.”

“오늘 일 늦게 마쳐서 갈 수 있을 지 잘 모르겠네. 어디서 보게?”

“저번에 갔던 압구정 바 기억나지? 거기서 보기로 했어. 시간 되면 와.”


술집에서 병철이와 떠든 지 삼십 분이 지났을 즈음 민지가 도착했습니다. 병철이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민지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나와는 어떻게 친해졌는지, 요즘은 무슨 알바를 하는지, 고등학교는 어느 동네에서 나왔으며 내가 옛날엔 얼마나 바보였는지 등등.


저는 민지와 병철이의 눈의 움직임에 신경을 기울였습니다. 병철이는 제 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다가 이따금씩 민지의 눈을 바라봤고, 그때마다 둘은 서로의 눈동자 색을 확인하는 듯 했습니다. 오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민지는 크게 웃을 때 옆 사람의 팔이나 등에 기대는 습관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앉은 테이블이 원형이었다는 것이겠죠. 그녀는 나와 병철이 사이에 앉아 이쪽저쪽으로 노선을 바꿔가며 관능적인 눈꼬리를 자랑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계속되었지만, 저는 병철이가 수컷으로서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에 대해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내가 더 나은 거 같고, 옷은 얘가 더 비싼 거 같긴 한데 센스는 내가 더 좋은 거 같아. 뭐 공부도 나 정도면 얘한테 꿀릴 정도는 아니지. 얘 여자 친구보단 내 여자 친구가 객관적으로 더 이쁘긴 한걸. 아무튼 내가 객관적으로 비교우위에 있음이 분명해.’


그런데 병철이도 여간 머리를 굴리고 있는  아닌  같았습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민지를 꼬실  있을  같은데. 얘도 나한테 호감이 없는  같진 않아. 근데 노튼이랑 그냥 친구 사이는 아닌  같던데 얼마나  걸까, 그냥 친구가 아니라면 나한테 던지는  눈빛은 뭐지? 지금 민지 발이랑  발도 닿아있는 . 은근한 스킨십을 원하는  아닐까. 노튼 눈치가 보여 말을 못하고 있는 건가?’


“아, 나 술 취한 거 같아.”

민지가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재빨리 거들었습니다.

“맞아, 얘 원래 술 약해.”

“에이 이것밖에 안돼? 실망스럽네~”

병철이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그에겐 실수였습니다. 민지는 조금이라도 속이 보이는 것 같은 남자를 싫어하거든요. 저는 무조건 이기는 수를 둔 거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겉옷을 입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우리는 택시를 탔습니다. 다행히도 병철이가 제일 먼저 내려야 했고, 그다음이 민지, 그리고 제 차례였습니다.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것도 사실 제 설계 중 하나였을까요?

여하간 저는 택시가 도착했을 때 조수석을 열어젖히고 병철이를 부르며 네가 먼저 내리니 이곳에 타라고 하였었습니다. 병철이 입장에선 외통수에 걸린 것이죠. 제 말을 거부하는 순간 민지에게 들이대 보겠다는 것을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민지는 술에 취한 듯 뒷자리에 늘어 앉았습니다. 한쪽 손을 은근히 제 쪽으로 빼 논 상태로요. 저도 아주 천천히, 천천히 왼쪽 손을 그녀의 손 가까이 가져갔습니다. 그녀의 손 끝과 제 손 끝이 맞닿았을 때, 그녀는 살짝 놀란 척을 하고는 손가락을 제 손톱에 살살 문질렀습니다. 손은 점점 더 포개져갔습니다. 제 손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지나다녔습니다.


병철이의 동네에 도착했을 때쯤 저는 기사님에게 멈출 곳을 설명해주는 척하며 잡았던 손을 빼고 앞좌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습니다. 이내 병철이의 집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병철아, 조심히 들어가고 또 보자.”

“그래, 너도 조심히 들어가.”


택시는 다시 출발하였습니다. 민지의 집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저는 말했습니다.

“아, 이제 술 깬다. 술 깨니까 배고프네. 아이스크림 먹고 싶지 않냐?”

“그러게. 빨리 편의점 가서 아이스크림 좀 사 와.”

“뭐 먹고 싶은데?”

“진짜 사주게?”

“어, 저기 씨유 보인다. 기사님 여기서 내릴게요.”


우리 둘은 민지의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오며 저는 민지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집이 있는 건물 앞으로 같이 걸어가며 그녀의 허리를 남방 안쪽으로 감아  몸과 밀착시켰습니다. 민지는 말없이 공동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저는 민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습니.





매거진의 이전글 고장 난 기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