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윌 노튼 Mar 20. 2019

인간실격

노튼의 첫 번째 수기


 저는 집에서 체벌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셨던 기억 때문에 저희 형제에게 절대 손을 대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에게도 체벌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주 어릴 적, 4살이나 5살 때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잘못을 하자 냉장고가 있었던 아주 작은 방으로 저를 끌고 가 청소기의 플라스틱 파이프로 종아리를 때리셨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감정은 슬픔이나 두려움보다는 괘씸함과 억울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랑 이렇게 가까운 관계면서 감히 날 때려?'랄까요. 물론 체벌은 아주 드물게 있었고, 심한 정도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 몸은 그 날의 배신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입니다. 제 인생의 첫 담임 선생님이 교회에 다닌다는 걸 안 어머니는 선생님께 저도 교회에 다닌다고 소개하며 기뻐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수업 중에 저를 혼내셨습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앞에 친구가 잘못한 일을 제가 한 것으로 잘못 알고는 "노튼, 너 교회 다닌다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런 짓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야단을 친 것입니다. 마치 제가 부모님을 욕 먹인 듯한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상대방이 제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실망했다는 어조로 화를 내면 저는 그것을 반박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말 자체를 꺼내기가 힘이 듭니다. 이미 화를 내버린 후에 저의 변명을 들으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노튼에 대한 신용의 문을 닫아버린 당신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이미 당신은 편파적인걸요.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이미 제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배신감, 괘씸함과 억울함이 마녀가 만드는 묘약처럼 뒤섞여 눈물이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한 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이 제 몸이 기억하는 배신감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저는 배신감이라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요조와 마찬가지로 저 또한 학교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놓여있었습니다. 유머감각도 있는 편이었고, 여자애들에게 인기도 많으면서 공부도 잘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도 저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들에게 유대감을 느끼려 노력하기는 싫었습니다. 저는 분명 그들이 저에게 갖는 기대를 언젠가 깨뜨릴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또 배신을 당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문제아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기대를 갖지 못하게 된다면 배신당할 일도 없을 거니까 말입니다. 수업시간엔 큰 소리로 짓궂은 말장난을 하며 수업을 방해하거나 앞자리에 앉은 애의 등을 때리며 괴롭혔고, 일부러 지루한 척 껌을 씹어댔습니다. 문제아가 되었어도 나의 연약한 위악을 선생님이 은근히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은 아직 남아있었는지, 선생님이 저에게 실망했다는 투의 말을 할 때면 어김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교회!

 교회도 빼먹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제게 어른들의 속물성을 알려줬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갔던 교회에서 우리를 한없이 밝은 미소로 맞아주던 집사님, 권사님들은 천사 같았습니다. 제가 똑똑하고 멋있게 크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어머니의 미모와 새로산 옷에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으며, 우리 집안의 풍요로움을 축복해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기억은 정말이지 아찔합니다. 인생은 아름답다는 말에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으니까요.


 교회 아줌마들은 설레는 소녀의 얼굴로 맘에 없는 칭찬을 마구 뱉다가도, 보는 눈이 없어지면 이내 히스테리 환자로 돌변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조금 늦거나 친구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무시무시한 지옥 이야기로 저를 협박했고, 교회 어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찬송이나 율동 연습 등을 하도록 강요해 저를 귀찮게 했습니다. 지금에서야 안 것이지만, 교회 사람들도 역시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타인들의 착한 모습이 모두 가짜라는 것이, 자신 또한 사실 다른 누구보다 세속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이 까발려질까 봐 말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는 내용의 쓰레기 책들을 암기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연기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자신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하나님 찬양을 연기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지극히 일상적이고 담담한 사실을 마주했을 때 인간은 한없이 작고 추해 보입니다. 이러나저러나 인간은 아주 낡은 동아줄 하나를 잡고 하늘을 오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 추락해 두개골이 으깨지고 척추가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역시 인생은 살아가기 힘든 것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