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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현 Oct 21. 2021

유대감은 유대감으로 무너진다

 26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사람을 미워하고 배척하여 자신들만의 무리를 이루는 태도는 겉모습만 달리할 뿐, 세월과 시대에 상관없이 일관적으로 나타난다.


 무리의 결속력은 구성원들의 감정에 달려있다. 쉽게 말해 좋아하면 뭉치고, 싫어하면 배척한다. 이는 본능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한다. 무리를 이뤄야 생존이 가능했던 원시사회를 떠올려보자. 공동체의 질서는 생존과 직결되고, 질서유지는 유대감, 동질감 등을 가져야 가능할 것이다. 즉, 자신과 통하지 않는 사람은 거르고 무리에 잘 동화되는 사람을 포섭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무리는 생존본능이 사회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한편, 무리는 차별과 배척을 낳는다. 본능 그 자체가 악해서 생긴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감정이 그렇게 설계돼 있는 탓이다.

 본능의 결과로 생긴 무리는 유대감을 공통으로 한다. 달리 말하면, 자신들이 싫어하는 사람들도 거의 공통될 가능성이 크다. 공통된 유대감이 가령 "나는 서글서글하고 쿨한 게 좋아."라고 한다면, 동시에 "나는 예민하고 뒤끝 있는 사람은 싫어."가 된다. 물론, 좋음 싫음은 이분법적이지 않아서 '좋지 않음', '싫지 않음'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러나, 감정은 원래 치밀하게 쪼개지지 않는 것이라서 극단과 극단을 진자 운동한다. 역설적으로, 공통의 유대감은 싫어하는 특정 인물을 적으로 만들고, 차별과 배제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까지 비관주의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아직 끝이 아니다. 위 설명은 우리 감정의 한계로 인해 본능에 따른 결과가 차별과 배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일 뿐, 좋고 나쁘다는 가치판단이 들어있지 않다. 우리가 문제라고 지적해야 할 점은 본능의 독주를 막을 제어장치의 유무에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제어장치는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있음에도 사용하는가, 사용하지 않는가의 문제다.


 제어장치를 쓰지 못하는 것인지(역량), 쓰지 않는 것인지(의지), 아니면 그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지(무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무지의 문제라면 아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그러나 역량의 문제라면 수양이 요구되거나 도움, 치료가 필요하고, 의지의 문제라면 인간에게 주어진 고등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기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제어장치는 바로 '생각'이다.


 본능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듯, 생각하는 능력, 즉 이성이든지 오성이든지 반성이든지(혹은 영혼이든지) 이것 역시 주어진 능력이다. 생각은 본능을 물 흐르듯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다. 본능에 따르는 것은 무척이나 편리하지만, 꼭 좋은 것을 담보하거나 옳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래서 생각으로 본능의 독주를 막을 필요가 있다.


 유대감으로 형성된 무리는 그 유대감으로 붕괴될 가능성도 크다. 감정은 치밀하지 못해 당장은 같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마찰할수록 차이가 서서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동질감을 갖는 무리는 곧 차이를 실감하고 또다시 자신들이 적을 차별했던 정확히 같은 이유로 쪼개질 수 있다. 이러한 엉성하고 성긴 인력에 생각을 부여하면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은 감정을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이 가능하다. 자신이 느끼는 동질감 혹은 배척 감이 진정 사실에 근거하는 것인지, 아니면 굳이 그런 감정을 지속할 필요가 있는지 잠시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본능은 반사적이라서 상황에 대응하는 반응일 뿐이지, 잠시 상황과 떨어뜨려 침착하게 판단할 여지를 주지는 못한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 이것이 상황에 합당한 반응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생각의 난입은 쉽지 않은 일이다. 본능은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인과 마찰하는 성인이라면, 보다 바람직한 관계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보고 학습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방부된 채로 전승된 부족사회의 생존본능을 답습했듯이, 아이들도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이 최선이었던 시대에선 본능이 효율적인 생활양식일 수 있지만, 우리가 사는 동시대는 과거만큼 생사를 놓고 다투는 투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성을 인정하고 모두가 어울리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유리한 시대다. 전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본능은 더 이상 현대사회에 꼭 맞는 반응이 아니다. 본능에 편중된 균형을 조정해 시대에 맞는 옷을 물려줄 필요가 있다.


 나와 다른 사람, 나와 코드가 다른 사람, 낯선 사람에게 보이는 거부반응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사회적 존재다. 자연과 조응하는 한편, 문명으로 극복해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눈부신 지성을 축적했고 무엇이 바람직한 생활양식인지 고민해왔다. 이제는 다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다. 그래서 어른이 앞장서 생각하고 본능을 제어하는 모범이 필요하다. 취미활동을 위해 성인들끼리 모인 집단에서도, 수 없이 많은 무리가 모였다 해체됨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바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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