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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현 Sep 08. 2021

지저분한 미덕

내가 추구하는 미덕은 더듬거리면서 이야기해야 한다.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 보니 새로운 모습의 니체가 들어왔다. 초인이 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말라는 과격한 모습과 달리, 조잡하고 더듬거려도 괜찮다는 안락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2부 5장, <기쁨과 정열>에 관한 생각이다.


 지저분한 미덕을 반길 사회는 없다. 만약, 누군가 '나는 폭력과 혼돈을 지향합니다. 그것만이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소개한다고 상상해보자. 면접은커녕 서류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미덕은 스스로 품은 의미가 그러하듯 아름다워야 한다. 지저분함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미덕은 정갈해야 한다. 지향하는 방향이 추악함, 더러움, 혐오와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 동시에 왜 그것을 지향하는지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선함과 일치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한 미덕은 지저분하다.


 사회는 안정과 질서를 추구한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가치, 그리고 다수에게 설득력 있는 가치를 원한다. 그래서 지저분한 미덕을 거부한다.


 그러나, 니체는 지저분한 미덕을 거부하지 않는다. 진정한 미덕이라면, 어떤 다른 이들의 미덕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열(Leidenschaft / passion), 그러니까 맹목적인 감정의 에너지에 의해 자라난 미덕이라면 그것이 지저분하더라도 사랑하라는 주장이다.




 니체를 쫓아가다 보면 쾌감이 따라온다. 금기를 부숴버리기 때문이다. 사회가 거부한 맹목적인 감정의 에너지를 니체는 바람직하다고 승인한다. 니체는 사회에 통용되는 행복, 정의, 성공, 평화, 평등 등 선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떼의 미덕으로 폄하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선을 추구하길 요구한다. 사회보다 자신의 정열을 우선하라는 것이다.

 

 한편, 니체의 사상은 위험하기도 하다. 그 열정이 폭력, 강간, 살인이더라도 허용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니체는 정열이 다혈질이든, 음란하든, 복수욕을 가지든 그것을 추구하는 데 죄스럽게 만드는 사회의 금기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니체를 둘러싼 논란도 주로 여기서 발생한다. 니체의 생각을 밀고 나가면 정복과 약탈이 정당화되고 귀족주의를 허용하게 된다는 점이 비판의 주를 이룬다. 나도 한때  내 안의 정열과 사회의 미덕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마련할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해묵은 논쟁인 데다 지금은 별 관심도 가지 않는 생각이다.




 이제 내 관심을 끄는 지점은 미덕을 추구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점이다. 니체는 자신만의 미덕(선)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도록!

"내 영혼을 괴롭히기도 하고 기쁘게도 하는 그것, 내 창자가 항상 배고파 원하는 그것.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자네 미덕은 너무나 고귀해서 이름 붙이기 힘든 것이야 돼.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 박성현 역 / 심볼리쿠스 / 91P


  대놓고 미덕을 추상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름 붙일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정리되지 않고 설득도 안 되는 이것이 과연 미덕이 될 수 있을까? 내 궁금증이 무섭게 니체는 답한다.

 더듬거리며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

 "이 미덕은 작은 새 같죠. 살다 보니까 제 집 처마 밑에 둥지를 틀었네요. 그래서 사랑하게 되었고 아끼게 되었을 뿐이죠. 아, 저기 보이죠? 이제 작은 황금색 알 위에 앉아 있군요!"

 이런 식으로 자네의 미덕을 더듬거리며 이야기해야 돼. 이런 식으로 자네의 미덕을 찬양해야 돼.

같은 책 / 92P


 내가 나만의 미덕을 추구하는 까닭은? 살다 보니 내 밑에 둥지를 틀어 사랑했을 뿐이다. 가장 명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회는 항상 구체적이고 정리된 미덕을 원한다. 자기소개서 속의 나는 하나의 미덕을 고정시키고, 내 모든 활동의 뿌리가 되어야 한다. 이를 설득하기 위해 나의 미덕이 마땅히 추구될만한 것이라는 것을 상세히 증명해야 한다.

 

 항상 무슨 뜻을 견고하게 가지며 살지 않았다. 그래서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 삶이 잘못되진 않았을까 많이도 무너졌다. 억지로 억지로 만든 문장들을 모아 결과물로 뭉쳐 서류를 제출할 때면 다른 사람이 지원하는 느낌도 들었다.


 아름다운 미덕에 지친 까닭인지, 니체는 위로가 되었다. 진정한 미덕이라면 더듬거리는 것이 당연하다. 너무나 따뜻한 말이었다. 나의 미덕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흔들거려 걱정됐다. 하지만, 이 흔들거림이 바람직하게 향하고 있는 신호라 확신이 들었다.




 보통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번역인이 음운을 살리기 위해 '짜라두짜'로 표기하겠다는 의지에 동감하여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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