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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현 Jul 12. 2021

알베르 카뮈, 「이방인」 리뷰

'Kibun'과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를 차용한 해석

만약 소설에 색이 있다면 이방인은 회색일 것이다. 아마 뫼르소 탓이 커 보이는데, 그의 엄마가 죽었을 때나, 연인이 사랑을 고백할 때, 이웃이 개를 잃어버렸을 때도,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앞두었을 때조차 그의 반응은 미적지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남들의 기분에 맞춰 자신의 기분까지 공명하지 않을 뿐이다. 소설을 살펴보면 유독 뫼르소의 주관적인 느낌이 작품 곳곳에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엄마가 죽고 나서 양로원의 지인들이 빈소 앞에서 애도할 때, 뫼르소는 우는 노인들 하나하나의 모습에 집중한다. 그 와중에 뫼르소는 울음소리를 그만 듣고 싶다거나 한숨소리와 흐느낌, 코를 훌쩍이는 과정을 하나하나 묘사하고 자신이 피곤하고 허리 아프다는 사실까지 내비친다. 그리고 찾아온 침묵 속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이것이 노인들이 제 볼의 안쪽을 빨아서 내는 야릇한 소리임을 알아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에 하나하나 자신의 생각을 묘사한다. 더불어 장례를 시작하기 전에 커피의 맛을 음미하거나 평소 같았다면 동료들이 출근하고 있을 거라는 사소한 생각까지 알 수 있다.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큰 사건 안에서도 쓸데없어 보이는 감정과 생각을 곳곳에서 일으킨다. 그 까닭은 뫼르소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죽기 마련이며 그 앞에선 어떤 특별한 것도 없다. 오직 현재 살아있는 자신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전부다. 달리 말해 그는 실존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실존은 지금 당장 살아가고 있는 나의 존재를 의미하며 실존은 오직 지금 여기서만 느낄 수 있다. 쓸데없어 보이는 그의 생각들은 그가 실존하는 근거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죽은 것도 커다란 사건이 아니라 쓸데없어 보이는 그의 생각과 경중을 따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뫼르소가 태연하게 빈소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관리자와 잡담을 나눈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실존에 집중하는 태도는 사랑을 나눌 때도 그러한데, 마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온통 육체적 욕망으로 향해있다. 자신에게 매력적인지, 성적으로 끌리는지 판단할 뿐, 마리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뫼르소에게 그것은 관계를 지속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마리는 이에 실망하고 사랑하는지 재차 묻는다. 뫼르소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결혼을 이야기할 때도 마리는 결혼이 중대한 문제라고 하지만 뫼르소 역시 중대한데선 동의하지만 결혼이 성립하는데 그 이유야 무엇이든 괜찮다는 입장이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결혼할 수 있냐는 마리의 질문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지만 뫼르소에겐 가능하다. 뫼르소에게 사랑과 결혼은 다른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연인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말할 뿐이다. 현실에서 여자 친구에게 저렇게 말한다면 아마 그 즉시 관계는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연애가 꼭 사랑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 욕망, 혹은 지적인 존경심에서도 연애는 가능하다. 뫼르소는 마리에게 욕정을 느끼는데 주목했고 거기서 연인이 된 것뿐이므로 마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연인이 원하는 달콤한 말을 통해 관계를 이어가는 것보다 자신의 실존에 주목하는 것이 뫼르소에겐 더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뫼르소는 공감능력을 상실한 것만 같다. 살라마니 영감이 개를 잃어버렸을 때, 영감은 심각한 걱정을 했다. 겉보기에 그는 과격하지만 개를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끔찍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뫼르소에게 동물보호소가 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을 때, 그는 위로를 바랐던 것뿐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사실대로 3일이 지나면 동물을 처분한다고 말했다. 영감이 개를 잃어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뫼르소에겐 자신의 일이 아니므로 공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을 진단할 때, 사회성을 기준으로 세운다. 이 사람이 얼마나 사회에서 잘 맞물려 살아가냐는 것인데, 뫼르소는 겉으로만 보면 사회성이 결여되어 보인다. 엄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으며 사랑 없이 연애하고 공감능력도 떨어지는 데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후회와 자책도 없다. 재판에서 검사가 그를 흉악범이라고 단정 지은 근거도 엄마가 죽고도 태연하게 일상을 즐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뫼르소는 이 재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흥미가 있었을 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뫼르소는 진정 사회성이 결여된 인물인가?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러할 뿐, 뫼르소는 일상생활에서 별다른 마찰 없이 잘 지내왔다. 회사에선 그를 인정하고 파리로 출장 보낼 계획을 했으며 마리는 여전히 뫼르소를 사랑했다. 그는 남들이 기피하는 레몽과도 친구를 맺었으며 살라마니 영감 역시 그가 엄마를 사랑했다고 이해한다. 법정에 섰을 때 역시 많은 친구들이 그를 위해 증인석에 섰다. 그는 결코 사회성이 결여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다.


사회는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태도를 요구한다. 사회는 뫼르소에게 장례식에서 슬픔을 요구했고 살인에 후회와 회개를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이상하다고 낙인찍는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는 법과 조금은 다른 것으로 특정한 감정 상태를 요구한다. 법은 용인될 행동을 구분하지만 사회는 더 나아가 ‘그러한 감정 상태’를 표출하도록 강요한다. 나 역시 작년에 친할아버지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나에겐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부장적 권력을 휘두르며 우리 엄마를 고생시키고 재산 문제로 자식들을 싸움터로 몰아세운 장본인으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의 아빠가 돌아가신 까닭에 아빠의 심정이 걱정될 뿐이었다. 3일장을 마치고 시신을 화장터로 보낼 때, 다른 모든 가족들은 통곡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마음 자체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이 끝나고 고모가 나를 가리키며 “쟤는 철학을 배워서 그런지 울지 않는다.”며 친척 형이 울었던 것과 비교했다. 다들 웃음으로 무마했지만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여기서 쓰인 철학은 고상한 척한다는 말을 돌려서 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감정에 솔직했을 뿐이다. 설령 슬프더라도, 장례식에서 울어야지만 슬픔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나는 그들로부터 멀어진 이방인이었다.


우리 사회는 기분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기분은 ‘Feeling’과 다르게 ‘Kibun’으로 번역되는데, 기존의 기분이 그저 감정을 나타낸 것이라면 Kibun은 주관화된 감정이 강화되어 절대화된 것을 의미한다. 즉 Kibun은 상대방이 배려해야만 하거나 내가 배려해야만 하는 대상이 된다. 가령 ‘불편을 끼쳐드린 점 죄송하다.’는 말은 사건의 잘잘못을 떠나서 상대방의 Kibun을 나쁘게 했기 때문에 사과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칫하면 사건의 문제를 축소시키는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Kibun이 나쁘지 않았다면 사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항상 상대방의 Kibun을 중요시한다.


같은 말로 지적할 때도 직설적으로 말하면 싸가지없고 에둘러 표현하면 품격 있다고 믿는다. 웃어른한테 말할 때도 말투, 태도가 많이 지적되는데 그 까닭이 버릇없다는 것이다. 버릇이 없다는 것은 곧 웃어른에 대한 공경이 부족한 것이고 공경이 부족한 것으로부터 기분이 나쁜 것이다. 여기까진 말의 형식이 Kibun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면 때론 우리의 감정을 속이면서까지 Kibun을 존중한다. 가령 여자 친구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보면 솔직한 내 심정은 대답하기 싫다. 유치한 건 물론이고 내 사랑을 시험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기분으로 하여금 여자 친구의 Kibun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갖은 미사여구를 붙여 대답한다. 혹은 내가 상급자의 실언이나 혐오발언을 듣더라도 그의 Kibun이 나빠 나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동감하거나 맞장구친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생각 이상으로 나보다 타인을 더 고려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뫼르소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타인의 Kibun을 신경 쓰고 말하지 않는다. 마리가 사랑을 고백할 때도 자신은 사랑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예심판사가 뫼르소에게 왜 총을 쏠 때 첫 발과 다음 발 사이에 공백이 있었냐고 물을 때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당당히 응대한다. 자신의 형을 결정 내릴 사람에게 조차 잘 보이기 위해 꾸며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심정만을 말할 뿐이다. 뫼르소에게 Kibun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흔히들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는 순간 뫼르소처럼 이방인이 된다. 남들의 이해를 벗어나고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사회가 세운 가치에 맞게 살아가려고 한다. 반면, 뫼르소는 부조리로써 반항한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서 사회가 세워놓은 기준에 어긋나게 살아간다. 이 부조리를 통해 그는 기성 삶에 저항한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그는 거리낌 없다. 오히려 사형장에 자신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증오 섞인 비난을 듣고 싶어 한다. 여타 사형수처럼 자신의 죄를 후회하거나 회개하지 않고 다가올 죽음에 당당히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는 죗값을 덜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꾸밈없이 자신을 내보인 탓에 죽음을 맞는다. 이러한 태도는 다가올 죽음에 저항하는 미련한 짓이 아니라 어차피 다가올 죽음에 긍정하는 실존적 태도다. 과거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한 것이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바로 그 모습이 바로 부조리한 반항의 태도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너무 타인의 기대에 살고 있진 않은지, 부조리한 삶에 부조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반성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부조리한 삶은 너무 무섭다. 타인의 손가락질을 받고 사는 삶은 두렵다. 왜냐하면 사회적 통념이 절대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 밖으로 나가 살기엔 너무나 연약한 존재다. 타인이 없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인」은 사회적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고 오히려 부조리로 가득함을 보여준다. 「이방인」 1부를 읽으면 당연히 뫼르소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인다. 사회성이 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부에 들어서는 순간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법정과 신앙의 태도가 오히려 더 이상해 보인다. 누가 들어도 궤변인 검사의 주장이 판사로부터 승인되는가 하면 법정의 논리로 판단해야 할 판사가 신앙을 도구로 회개에 임하면 형을 줄여줄 것처럼 얘기하는 부조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권력을 이루는 법과 종교가 비합리적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사회적 기준이 뫼르소보다 더 부조리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권력은 완벽하지 않다. 우리가 Kibun을 고려하는 것도 권력관계와 떼어낼 수 없는데, 우리는 아랫사람의 Kibun은 잘 고려하지 않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타인의 Kibun이나 윗사람의 Kibun을 고려한다. 이 Kibun은 사실 권력이 남긴 찌꺼기와 같다. 가령 밥을 먹을 때 윗사람보다 먼저 먹지 않거나 밥그릇을 들고 먹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가르침 받는다. 이러한 예의는 사회적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고 최종적 목적은 조화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의를 어겼을 경우 윗사람은 곧잘 Kibun이 상하는데, 그것이 질서와 조화를 헤쳤기 때문이 아니라 감히 아랫사람이 나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예의는 개인의 Kibun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 오염된다. 이는 데라다의 의사-초월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초월성이란 경험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법이나 권력 같은 질서가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작동해 온 거대한 힘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초월성은 절대성을 가지며 우리의 삶을 좌우한다. 이러한 '초월성'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선 반복될 필요가 있다. 이 반복은 꼭 초월적이지 않은 것을 경유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초월성은 초월성이기 위해 초월적이지 않은 것을 항상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가령 법(초월적인 것)은 법전(초월적이지 않은 것)에 기록된 형태로 전해져야 하며 종교(초월적인 것) 역시 성경(초월적이지 않은 것)에 기록된 형태로 전해진다. 이때 기록은 ‘전해지기’ 위한 필수요소로서, 데리다는 이것을 ‘에크리튀르’라고 한다. 이 에크리튀르는 경험적인 것이다. 때문에 경험을 넘어서는 초월성에게는 그 자신의 지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이질적인 것이다. 따라서 초월성이 초월성을 획득하기 위해 에크리튀르로 반복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사고해보자면 사회적 기준, 법, 종교 등은 이미 그 본래적 의미를 잃고 오염되어있다. 예심판사가 신을 믿지 않아 회개하지 않는 뫼르소에게 화를 내는 장면을 주목해보자. 판사는 화낼 이유가 없다. 자신이 믿는 교가 진정 초월적이라면 뫼르소가 어떻게 믿든 상관없다. 그러나 화를 낸다는 것은 자신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Kibun이 상한 것이다. 마치 종교 믿음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 수단이 된 느낌이다. 여기서 종교는 원죄를 씻기 위한 ‘초월적인’ 길이 아니라 판사의 의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여기서 초월성이 이미 오염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뫼르소의 솔직한 태도야말로 순수하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상대의 Kibun을 위해 말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여기엔 어떤 오염도 없다. 초월적이라고 불릴만한 순수함이 뫼르소에겐 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 예심판사는 하나의 에크리튀르다. 신, 종교라는 가치가 초월성을 획득하기 위해 '예심판사'의 말에 의해 그 가치가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심판사는 초월적이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다. 신의 절대적인 말씀은 예심판사의 알량한 자존심에 의해 오염돼버린다. 신은 그 초월성을 상실하고 예심판사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작중의 뫼르소는 결국 사형수가 되지만 이로부터 우리는 부조리에 끝까지 저항한 뫼르소의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삶 자체가 부조리하며 오히려 순수한 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감정, 느낌이다. 데리다는 법과 같은 권력이 일반적인 윤리를 만들어 개별 타자들의 독특성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뫼르소와 같은 이방인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뫼르소의 반항은 이러한 법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이미 오염되어 있는 법은 균열될 가능성을 언제가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솔직함에 있다. 솔직함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성으로, '일반적'인 사람을 요구하는 법과 달리 실존에 충실한 개체들의 감정과 느낌에서 나온다. 즉 일반성으로 포괄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각자의 특수성을 내보이며 일반성을 깨뜨리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 특수한 개별성까지 고려하는 것이 정의라고 보았으며 법을 해체하는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보았다. 뫼르소가 살아온 내용이 어떠하든, 그가 감정에 솔직하게 살아온 것은 삶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부조리였으며 일반성으로 획일화시키려는 폭력에 저항하는 정의였다. 「이방인」이 주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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