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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현 Jul 16. 2021

영화 <노킹온 헤븐스 도어> 리뷰

마틴과 루디가 바다로 향하는 까닭은? / 스포일러 주의

https://pedia.watcha.com/ko-KR/contents/m5ZXDlO




실존주의적 색깔이 짙은 영화였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때만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욕구는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끈다. 마틴과 루디는 시한부 삶에서 바다라는 목적을 세웠고 목적을 향해 직진한다. 직진이란 장애물이 있어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장애물을 부순다.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한데, 영화 속에선 절도와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돈과 차를 훔치고 총을 사용한다. 바다로 가기 위해 가장 빠른 길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일반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나타나는데 첫째, 경찰로 위장한 마틴과 루디가 한 시민에게 차를 빼앗고 거짓 임무를 주자 시민은 그들의 말에 복종한다. 경찰이라는 권력에 쉽게 굴복하는 모습이다. 또한 권력을 가진 사람 조차 같은 모습을 보인다. 바로 둘째, 마틴에게 협박당한 경찰이다. 경찰은 총을 가지고 권력을 휘두른다. 그러나 마틴이 총을 들고 나타나자 경찰의 고압적인 태도가 180도 뒤바뀐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과 힘에 곧잘 자신들의 목적이 좌절된다. 심지어 마피아들도 자신들의 보스에게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나 마틴과 루디는 힘에 굴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힘을 가진다. 바다로 가기 위해서다. 따라서 절도와 폭력을 저지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죽음을 목전에 둔 존재들은 그렇지 않은 존재들보다 삶의 목적을 강렬하고 열정적으로 추구한다. 진짜 삶을 사는 것이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이 시점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마틴과 루디가 바다로 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다가 주는 상징은 마피아 보스의 말을 빌려 알 수 있다. "바다는 해가 저물어 잠기는 곳이다." 강렬하게 타는 태양도 결국 바다 밑으로 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태양처럼 강렬하게 살아가는 듯하다. 제 몸을 태우면서 빛을 내다 저문다. 빛은 아마도 우리가 바라는 찬란한 삶의 징표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빛이 진정한 삶을 보증해 주는 것인가? 우리는 치열하게 살아간다. 우리 몸을 태워가며 말이다. 세월은 흘러가고 죽기 전까지 우리 몸을 불사르다 간다. 하지만 목적이 분명해 보이진 않는다.


이러한 모습을 영화에서 시사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경찰과 마피아의 대치 장면이다. 경찰과 마피아의 목적은 본래 마틴과 루디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들은 서로를 향해 총을 쏜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오직 마틴과 루디만 바다를 향해 곧장 간다. 목적이 분명한 것이다. 서로 다른 점은 하나다. 죽음을 직시했는가 아니가의 차이다. "바다는 해가 저물어 잠기는 곳"이라는 것은 삶이 죽음을 향한다는 의미다. 마틴과 루디가 바다로 향하는 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찰과 마피아의 총격전에서 차가 폭발에 불타는 것은(유독 이 폭발 장면이 화염을 내뿜으며 두드러진다.) 죽음을 마주하지 않은 채 의미 없이 자기 삶을 태우고 있는 태양을 상징한다. 이 차이 속에서 바다 없는 태양, 즉 죽음 없는 삶은 진정한(목적이 뚜렷한) 삶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마피아 보스는 "바다에 이르면, 결국 태양은 지고 자신 안에 있는 영혼의 불꽃만이 남는다."라고 말한다. '영혼의 불꽃'은 삶이 죽음으로 향한다는 점을 인지 했을 때 지펴지는 것으로, 진정한 삶의 목적을 암시한다. 태양이 바다에 가라앉더라도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의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마틴과 루디는 바다에 도착했고 목적을 이뤘다. 시한부 인생이 보여준 힘은 절망이 아니라 끝까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무한한 힘이었다.


+

영화의 절정에 등장해서 주제의식과 교훈을 남기는 인물은 마피아 보스다.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지혜를 건네는 자가 어째서 폭력의 정점에 선 인물인 것일까.'이다. 상식적인 눈에선, 지혜와 폭력은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폭력의 정점에 서기 위한 과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 속엔 마피아 보스에 대한 설명이 없으므로 상상해 의존해야 한다. 정점에 서기까지 보스는 많은 적들을 무찔러 왔을 것이다. 폭력은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곧, 보스의 권력투쟁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과 동일하다. 죽기를 두려워했다면 보스는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폭력의 정점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을 불사할 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환경은 보스의 삶을 언제나 죽음과 직면하게 만들었을 테고, 그러한 경험은 지혜가 되어 체득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폭력과 지혜가 죽음이라는 실존적 영역에서 함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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